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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135
한자 德川里
영어공식명칭 Deokcheo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명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주군 구이면 덕천리로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5년 - 전주군 구이면 덕천리에서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7.74㎢
가구수 445세대[2018년 6월 30일 기준]
인구[남/여] 1,012명[남 529/여 483]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덕천리는 본래 전주군 구이면 지역으로 1914년에 지방행정제도를 전면 개편하는 과정에서 몇 개의 마을을 병합하면서 ‘덕천리’라 명명되었다.

[형성 및 변천]

덕천리는 본래 전주군 구이면 지역으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행정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면서 총명리, 칠암리, 와동리, 지등리, 구암리와 난전면 석구리의 일부를 병합하고 ‘덕천리’라 해 구이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전주군이 전주부로 승격함에 따라 완주군 구이면으로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덕천리 남쪽에는 경각산이 있고 북쪽으로 점점 낮아지는 지형이다. 큰불재, 노룩목재 등의 자연생태자원이 있다. 덕천리의 자연마을인 구암마을에는 호채산, 태봉산, 경각산, 고덕산, 각시봉, 광대봉, 거북바위, 돌담길, 정자목, 불등재[큰불재, 작은불재], 홀아비샘 등이 있다. 특히 구암마을은 아버지산 경각산과 어머니산 모악산이 함께 있어 명당으로 꼽힌다. 흙 돌담이 곳곳에 있으며 호채봉의 등산로와 경각산 자락의 경관이 좋아 패러글라이딩의 명소이기도 하다. 덕천리의 자연마을인 지등마을에는 각시봉, 광대봉, 광대봉방죽, 둔재밭재, 묘골, 광곡천, 평촌천, 여시박굴 등 자연생태자원이 있다.

[현황]

덕천리의 면적은 7.74㎢에 2018년 6월 30일 기준 인구수는 총 445세대에 1,012명[남 529명, 여 483명]이다.

덕천리의 자연마을로는 원덕천, 구암, 지등, 와동, 칠암, 청명이 있다. 원덕천은 법정 이명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덕천’이라는 뜻에서 ‘원’을 덧붙인 것이다. ‘덕천’이란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덕’은 ‘터’의 고어이니 ‘텃내’의 한자 표기가 ‘덕천’이 된 것이다. 옛 이름으로 ‘안터’라고도 불렸다. 조선말기에 여산송씨가 들어와 마을을 만들었고 그 후에 김해김씨가 들어오면서 여산송씨는 세가 약해지고 김해김씨는 큰 부자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해김씨의 세도 약해지고 현재는 각성바지이다. 예전에 마을 중간으로 물이 흘러 지금도 땅을 파면 모래 자갈이 나온다고 한다. 재실의 주인이었던 마을의 부자 유씨가 마을 앞길을 내고 전주의 동원을 뜯어다가 재실을 지었다고 한다. 원덕천마을에는 재실터, 효자 김계헌의 효자문, 삼괴정, 여산송씨의 열녀문, 너새집 등의 역사문화자원이 있다.

칠암[칠애미]마을은 일곱 개의 큰 바위가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은 대체로 구릉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기와집이 많이 있다. 현재 100여 세대 26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구암마을은 1522년(중종 17)에 수원김씨, 동래정씨, 연안이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칠암 지역은 고덕산 줄기를 따라 약 500리를 뻗어 내려와 옆에는 아버지산 경각산, 앞에는 어머니산 모악산이 있는 장엄한 대명당(大明堂)이다. 명당인 이곳에는 조선 8대 임금인 예종의 태를 묻었다는 태실(胎室)이 있었고 태실 아래 큰 웅덩이가 있었는데 웅덩이에 살던 큰거북이가 알을 낳던 중 하나가 이곳에 떨어져 거북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거북바위는 그 둘레가 19m에 높이 4m에 이르고 아래로 9개의 작은 거북 형상이 있다. 거북바위 등에는 줄이 처져 있어 거북이의 등을 연상시키고 등에 있는 버선본 모양은 장수가 쉬어간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전한다. 무병장수를 상징하기도 하는 거북이의 모양을 한 바위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해 귀한 아들을 팔아 무병장수를 기원한 이들도 있어 지금도 바위에 그 이름과 아들을 팔았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신령한 거북 형상을 따라 현재의 구암마을은 귀동(龜洞)골 귀암(龜岩)으로 불렸으며 당시 행청 장소는 구암마을 1039에 위치하고 창집은 973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일제강점기에 공출을 목적으로 운암도로가 신설되면서 항가리 구면청으로 지금의 면사무소를 이전했다고 전한다. 귀동골 구암은 약 370년 유지하고 내려오던 중 고종 말기에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면서 거북 귀(龜)를 쓰거나 부르기가 어려워 아홉구(九)로 고쳐쓰기 시작하면서 ‘귀동(龜洞)골’을 ‘구이(九耳)면’으로, ‘귀암(龜岩)’을 ‘구암(九岩)’으로 부르게 되었고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구암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덕천리에 속하게 됐다. 황씨 재각, 장씨 열녀각, 4개의 지석묘, 구암교회, 정각사, 구면청터, 예종태실비 일부, 효자비, 열녀비 등의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하다. 지등은 마을이 구릉지대에 형성되었고 많은 등성이 있으므로 생긴 명칭이라고 한다. 지등마을은 우주황씨 집성촌이며, 삼우당, 구암교회, 고인돌 등의 역사문화자원이 있다.

와동[지새울]은 기와집이 많아서 생긴 이름으로 ‘지새’는 기와, ‘울’은 ‘골’의 변한 말이다. 연안이씨가 마을 주요 성씨를 이룬 각성바지마을이다. 청명[동조골]은 부분명이 내청명[안청명, 골안], 외청명[바깥청명]으로 ‘내청명’, ‘외청명’은 청명을 위치에 따라 구분한 명칭이고, 동조골은 칠암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완주군 구이면 덕천전원길에 1종 전문박물관인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이 2015년 10월 15일 개관해서 지역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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