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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173
한자 雲谷里[華山面]
영어공식명칭 Ungok-ri[Hwasan-mye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운곡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주군 화산면 운곡리로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5년 - 전주군 화산면 운곡리에서 완주군 화산면 운곡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8,635㎢
가구수 165세대[2018년 6월 30일 기준]
인구[남/여] 320명[남 171/여 149]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운곡리은 본래 고산군 운서하면 지역으로서, 『한국지명총람』에는 “숯을 구웠으므로 숯실 또는 탄곡, 수실이라 하며 또는 운곡이라 하였다”라는 데서 유래를 알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운곡리은 본래 고산군 운서하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운곡리, 서천리, 학항리, 부현리, 돈의리, 학봉리, 봉산리, 판교리와 운서상면의 북장리 일부를 합치면서 ‘운곡리’라 이름하고 화산면에 편입시켰다. 1935년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되어 분리되고, 전주군을 완주군으로 개칭되면서 완주군 화산면 운곡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운곡리 동쪽으로는 봉산과 고성산, 서쪽으로는 수리산, 북쪽으로는 말목재가 있어 충청남도 논산시와 경계를 이룬다. 지방도 제643호선이 운곡리 전체 마을 앞을 지난다. 동쪽으로는 완주군 화산면 춘산리, 서쪽으로는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완주군 화산면 우월리, 남쪽으로는 완주군 화산면 화월리완주군 화산면 화평리, 북쪽으로는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가 경계를 이룬다.

[현황]

운곡리[화산면]의 총면적은 8,635㎢이며, 인구수는 2018년 6월 30일 기준 총 165세대, 320명[남 171명, 여 149명]이다.

운곡리의 행정리로는 봉판, 돈의, 수실, 부현, 석천이 있다. 봉판(鳳板)마을은 봉산과 판교마을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행정마을 명이다. 석학천이 마을 가운데로 흐르고 자그마한 농경지를 사이에 두고 동쪽은 봉산, 서쪽은 판교마을이다. 봉판마을은 건조한 땅에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한지 생산으로 소득을 유지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대규모 한우 사육단지로 변모한 곳이다. 특히 구한말 의병장인 국영환(鞠榮煥)의 출생지가 봉산마을이다. 봉판마을에는 결성장씨들의 재각인 봉산재가 있다. 돈의(頓儀)마을은 본래 운서면 돈의동리(頓儀洞里)로 한 때는 한지 생산 마을이었다. 한편 수실(壽室)마을은 달리 숯실, 탄곡 등으로 불리는데, 화산-논산 간 지방도로에 보이는 ‘수실마을’ 표지판에도 불구하고 도로에서는 외딴집 한 채만 보일 뿐 골짜기가 깊어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으로 보아 수실마을은 다분히 숯을 굽던 골짜기거나 피난처의 역할을 수행하던 곳일 가능성 있다. 부현(釜峴)마을은 운서면 가마치리(駕馬峙里)로 마을 뒷산이 가마솥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가마산[釜山, 283m]이고, 수실마을로 이어지는 교통로인 재 이름이 가마재 였기에 마을 이름이 그대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처음부터 ‘가마재 마을’이었던 것이다. 한편 부현마을은 두 번이나 마을 전체가 전소되는 화재를 겪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 막바지에 있은 군경의 빨치산 소탕 작전 때문이다. 퇴로가 막힌 빨치산들은 마을에 들러 식량과 음식 등의 제공을 요구하며 약탈을 일삼았고 위협을 느낀 주민들은 음식과 편의를 제공했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충남치안대에서 경찰과 군인 가족 5가구만을 제외한 전 가옥에 방화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1955년에 마을 어느 집에서 한약을 달이던 중 실수로 불이 났는데 마침 강풍에 의해 번져 세 가구만을 제외한 전 가옥이 불탔다고 한다. 두 번이나 큰 화재를 당한 뒤 마을에서는 가마솥에 물이 없어 화재에 취약하다고 해서 마을 가운데에 인위적인 방죽을 조성하기도 하고, 가마재가 낮아 화기가 마을로 들어온다고 해서 1960년대 초에는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지게로 성토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석천(石泉)마을은 크게 3개의 옛 마을이 합쳐진 것이다. 하나는 석천이고 또 하나는 학정이고, 나머지 하나는 선대이다. 우선 가장 유서가 깊은 곳은 석정이다. 이 지역은 1960년대까지도 한지 생산이 유명했으며, 농가소득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군의 전통산업인 한지·화선지, 장판지 등의 제지업(製紙業)은 크게 쇠퇴하고 현재는 한우 사육이 집단으로 이루어져 면 단위로는 전국 제일이며 면내에서도 제일 많이 사육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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