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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338
한자 參禮集會
영어공식명칭 Samnye Rally
이칭/별칭 삼례취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대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864년 - 삼례집회 동학교주 최제우 처형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2년 11월 1일연표보기 - 삼례집회 발생
종결 시기/일시 1892년 11월 12일 - 삼례집회 폐회
종결 시기/일시 1892년 11월 21일연표보기 - 삼례집회 해산
발생|시작 장소 삼례집회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지도보기
종결 장소 삼례집회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지도보기

[정의]

1892년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일대에서 교조의 신원, 동학의 공인,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한 집회.

[개설]

1892년 10월 공주집회[공주취회]에 이어 동학 교주 최시형이 주도해 1892년 11월 1일 삼례[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일대]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전라감사에게 소장을 전달하는 대표로 좌도의 유태홍과 함께 우도의 전봉준이 나섰고, 교조의 신원과 동학의 공인은 조정의 소관이라 하며 거부되었으나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은 금지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역사적 배경]

1801년(순조 1) 정조 사후(死後) 계속된 세도정치의 폐해로 인한 기강의 해이와 부정부패는 고스란히 조선의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거기에 수년간 계속되는 자연재해와 함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사적 흐름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불러왔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 분위기에서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시천주(侍天主)]”며, 인간 평등을 기본으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내세워 1860년에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東學)은 삼남 지방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이에 놀란 위정자[통치자]들과 기득권 세력은 동학의 탄압에 앞장섰다. 그 결과 1863년(철종 14) 12월 최제우를 체포하고, 1864년 3월 대구부[대구광역시] 장대(將臺)에서 “태평한 세상에 난을 생각하여 몰래 당을 모으고, 세상 사람들을 속여 정신을 홀리고 어지럽히며 사술(邪術)로 정학(正學)을 어지럽힌다.[평세사난(平世思亂) 암지취당(暗地聚黨) 혹세무민(惑世誣民) 좌(사)도난정(左(邪)道亂正)]”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후 정부의 동학 금지령을 빙자해 수령, 아전, 토호세력의 탄압과 수탈이 이루어졌다.

[경과]

최제우가 순도(殉道)[정의나 도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 이후 제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을 정리 및 발간하고,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해 포교에 나섬에 따라 1880년대 중반에는 동학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학 교단은 1892년(고종 29) 10월 충청남도 공주에서 첫 번째 집회[공주취회]를 갖고, 충청감사에게 교조 최제우의 신원, 동학 공인, 동학 교인들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충청감사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 동학 공인은 정부의 소관으로 답할 수 없고, 대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과 수탈은 금지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에 자신감을 느끼게 된 동학교단은 삼례[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서 집회를 하게 되었다. 바로 ‘삼례집회’이다. 본래 삼례집회에는 교주 최시형이 직접 참여할 계획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동학교단에서 모든 힘을 동원해 삼례집회를 개최했다. 동학교단의 주도로 삼례에 모인 교도들은 공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라감사에게 소장(訴狀)을 제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없자, 우도(右道)의 전봉준(全琫準)과 좌도(左道)의 유태홍(柳泰洪)이 자원했다. 소장의 내용은 공주집회 당시 충청감사에게 올린 것과 비슷했다.

[결과]

전라감사는 교조 신원과 동학 공인은 정부에서 처리할 일이라고 해결해 주지 않고, 대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과 수탈을 금지할 것을 약속했다. 교조 신원과 동학 공인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과 수탈의 탄압은 금지하겠다는 성과를 얻었다.

[의의와 평가]

삼례집회는 동학의 성장과 함께 그동안 동학에 대한 정부와 기득권 세력의 탄압과 침탈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방식에서 적극적인 대응으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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