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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493
한자 三奇里吳熙瞻旌閭
영어공식명칭 Monument Gate for O Hui-cheom in Samgi-ri
분야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상삼마을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3년연표보기 - 삼기리 오희첨 정려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2013년 - 삼기리 오희첨 정려 중건
현 소재지 삼기리 오희첨 정려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상삼마을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팔작지붕|겹처마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낙안오씨
관리자 낙안오씨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상삼마을에 있는 개항기 정려.

[개설]

오희첨(吳熙瞻)[1755~?]의 본관은 낙안, 자는 사순(士淳), 호는 기암(奇巖)이다. 할아버지는 봉계 오명좌(吳命佐), 아버지는 오언박(吳彦博)이다. 오희첨고산면 삼기리 출신이다. 오희첨은 어려서부터 항상 부모의 곁에서 모시며 날마다 부모를 기쁘게 해 드렸다. 이웃 어른들이 혹시 과일이나 떡을 주면 반드시 가슴에 품고 가서 부모께 드렸다. 점점 자라서는 몸소 밭을 갈아 곡식을 심고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해 부모를 극진히 봉양했다. 1771년(영조 47) 겨울에 아버지 오언박이 이질에 걸려 자리에 누웠는데 석달이 되자 식갈(食渴) 증세가 나타나 하룻밤에 죽을 드리기를 10여 차례 했다. 오희첨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허리띠도 풀지 않고서 직접 죽을 끓이며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더니, 마침내 약을 쓰지 않고도 효험이 있었다. 1776년(영조 52) 겨울에는 어머니의 병환이 매우 심해져서 오희첨이 약 맛을 보고 똥맛을 보면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했다. 어머니가 운명할 지경에 이르자 오희첨은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게 했다. 오희첨은 상을 치르면서 몸을 해칠 정도로 슬퍼해서 초상을 치르고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1788년(정조 12)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3일간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았다. 장사를 마칠 때까지 이빨을 보이지도 않았다. 오희첨은 매월 초하루 묘를 찾아갔는데 죽을 때까지 거르지 않았다. 인근의 선비들이 오희첨의 효성에 대해 감영에 올려, 1890년(고종 27)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 童蒙敎官)의 벼슬과 함께 정려를 받았다. 오희첨의 아들은 오종휘(吳宗輝), 손자는 생원 오도상(吳道常) 등이다.

[위치]

삼기리 오희첨 정려각은 고산면 고산천로 854-35, 낙안오씨 재실인 봉서재 옆에 있다. 고산면에서 732번 도로를 타고 북동쪽으로 가다가 봉림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643번 도로를 따라 17번 완주로 국도 지하를 통과해 약 250m를 가면 우측으로 고산천로와 이어진다. 우회전하면 지역경제순환센터[구 삼기초등학교]가 있으며, 초등학교 앞쪽으로 진행하면 완주농업창업지원센터가 보인다. 이 앞에서 좌회전해 약 80m를 가다가 우회전해서 17번 국도 굴다리를 통과하면 낙안오씨 재실인 봉서재가 나온다. 삼기리 오희첨 정려각은 봉서재 옆에 있다.

[변천]

1890년(고종 27)에 명정 되고, 1893년에 삼기리 오희첨 정려를 세웠다. 2013년 10월에 정려각을 재건축하여 상량을 올렸다.

[형태]

삼기리 오희첨 정려각은 돌로 된 담장이 있고, 담장 안에 정면 1칸[245㎝], 측면 1칸[247㎝]의 팔작지붕, 겹처마이다. 정려각 안에는 현판이 있다. 현판의 명문은 ‘효자 증조봉대부 동몽교관 오희첨지려(孝子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吳熙瞻之閭)’이다.

[현황]

삼기리 오희첨 정려각 옆에 낙안오씨 재실이 있으며, 2013년에 재건축해 상량을 올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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