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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621
한자 崔純爵
영어공식명칭 Choi Sun-jak
이칭/별칭 완주부개국백(完州府開國伯),문열(文烈)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1108년(예종 3)연표보기 - 최순작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남자
본관 전주(全州)
대표 관직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정의]

고려 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문신이자 전주최씨·완산최씨의 시조.

[가계]

최순작(崔純爵)[?~1108]은 전주최씨 문열공파와 완산최씨의 시조로 고려 초의 평장사(平章事) 완산백(完州伯) 최언위(崔彦僞)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문정공(文貞公) 최재(崔宰)의 6대조이자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7대조이다.

[활동 사항]

최순작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고려 정종(靖宗)[1034-1046] 때에 벼슬길에 나갔으며, 문종[1046-1083] 때에 과거에 급제했다. 문학(文學)이 뛰어나서 이로 말미암아 신임을 받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문무를 겸비해서 무략(武略) 또한 뛰어나 국방에 관한 일도 겸임해서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고려 조정에서 남경(南京)을 만들려고 할 때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고려가 처음으로 기자묘(箕子廟)를 세우려고 검토할 때에도 조정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으나 적극적으로 설립을 주장해 기자묘를 세우게 되었다. 병부상서 겸 신호위 상장군이 되었고, ‘완주개국백(完州開國伯)’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숙종[1095-1105]에 이르러 벼슬을 내놓으니 문과 무의 공으로 ‘완주부개국백(完州府開國伯)’으로 봉작을 받았다.

「순작문열공사적」에 의하면 고향인 완주 지역으로 내려와 처사 곽여(郭與)와 교류를 하면서 친하게 지냈으나, 곽여는 결국 다시 벼슬에 나가 관복을 입고 임금을 섬겼다. 그러나 최순작은 한 번 물러나서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깨끗한 옷을 입고 산과 물을 벗 삼아 지내니,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곽처사[곽여]는 금문(金門)의 우객(羽客)이요, 최완주[최순작]는 옥동(玉洞)의 재상(宰相)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윤관이 다시 여진을 정벌하려고 할 때 윤관이 완주로 공을 찾아와 원로로서 자문하니 여러 가지 대책을 제시했고 윤관은 마침내 여진을 토벌할 수 있었다고 한다. 1108년(예종 3) 9월에 죽으니 ‘문열(文烈)’이라는 시호[諡]를 받았다. 최순작은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어서 학문과 무예가 아니더라도 하는 일은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조정에 출사한 지 20여 년에 청백을 숭상해 정치에 임하고 얻은 공로는 항상 남에게로 돌렸다고 한다.

[묘소]

최순작의 묘소는 미상이다.

[상훈과 추모]

최순작은 고려 숙종 때 완주부개국백(完州府開國伯)으로 봉작을 받았고, 예종(睿宗) 3년 9월 문열(文烈)이라는 시호[諡]를 받았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02.04 업데이트 시조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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