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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709
한자 韓晉錫
영어공식명칭 Han Jin-seok
이칭/별칭 경삼(景三),송은(松隱)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화평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3년(순조 33)연표보기 - 한진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70년(고종 7) - 한진석 사마시 합격
몰년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한진석 사망
거주|이주지 한진석 거주지 - 전라도 고산현
성격 학자
성별 남자
본관 청주(淸州)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현에 거주한 학자.

[가계]

한진석(韓晉錫)[1833~1909]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자는 경삼(景三)이며, 호는 송은(松隱)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무과 급제자 한봉교(韓鳳敎)이고, 어머니는 이양억(李瀁檍)의 딸이다. 작은아버지인 생원(生員) 한영교(韓永敎)에게 입후되었다.

[활동 사항]

한진석은 1870년(고종 7) 사마시에 합격했다. 1876년(고종 13) 김제에서 고산으로 옮겨가서 선영(先塋)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고, 아들, 조카와 향촌의 수재들을 가르쳤다. 한진석은 1886년(고종 23)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더욱 전념했다. 갑오년(1884년)과 을미년(1895년)에 각각 변복(變服)과 삭발(削髮)의 명령이 내려졌으나 오히려 옛것을 지키려는 마음을 굳히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옷이 비록 해지더라도 소매를 좁게 한 옷은 입지 않을 것이며, 머리가 빠져 비록 대머리가 된다 할지라도 머리털을 깎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02년(광무 6) 강경(江景)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908년(융희 2) 다시 제주도에 들어가 살았는데, 한진석의 인격에 교화된 사람이 많았다. 제주도에서 1년여를 살다가 사망했다.

[학문과 저술]

한진석의 문집으로 1914년에 아들 한학수(韓學洙)와 권양채(權陽采) 등이 편집해서 간행한 『송은집(松隱集)』이 있다. 『송은집(松隱集)』은 5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권두에 김성근(金聲根)의 서문과 권말에 학수와 생질 송순헌(宋舜憲)의 발문이 실려 있다. 발문에 따르면 한학수가 선친의 유고가 간행되지 못한 채 집안에 묵혀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산일(散逸)될 것을 안타까워해서 원고를 수습·정리해 1915년에 목활자본으로 간행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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