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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717
한자 權三得
영어공식명칭 Gwan Sam-deuk
이칭/별칭 권정,사인,삼득,가중호걸,권삼보,권선달,권생원,권사인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동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71년(영조 47)연표보기 - 권삼득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41년 5월 7일(헌종 7)연표보기 - 권삼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3년 - 권삼득 추모 '국창 권삼득 기적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0년부터 매년 개최 - 국창 권삼득 추모 전국국악대제전
출생지 권삼득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권삼득 거주지 -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
활동지 권삼득 활동지 - 전라북도 남원시|서울
묘소 권삼득 묘소 -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 이목정 오좌
성격 판소리 명창
성별 남자
본관 안동(安東)
대표 경력 판소리 창법 덜렁제 개발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 출신 국악인.

[가계]

권삼득(權三得)[1771~1841]은 안동권씨(安東權氏) 추밀공파 28세손 권래언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권정(權亻+政)이며, 자는 사인(士仁)이고, 호가 삼득(三得)이다.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 불리기도 한다. 판소리 창본(唱本)에는 권삼보·권선달·권생원 등, 「광대가(廣大歌)」에는 권사인(權士仁)으로 나온다.

권삼득은 1771년(영조 47)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에서 태어나 1841년(헌종 7) 5월 7일 사망했다. 『조선창극사』에는 전라북도 익산군 남산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권삼득의 아버지 권래언의 문집 『이우당유고집(二憂堂遺稿集)』이 발견되면서 권삼득의 정확한 출생지와 가계가 밝혀졌다. 한편, 『남원지』에는 “남원 주천방 노씨가 권삼득의 외가”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 전라북도 남원시는 권삼득이 판소리를 수련한 곳으로, 전라북도 익산군은 가문에서 쫓겨난 후에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활동 사항]

권삼득은 신분이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적 재질이 뛰어나 글 배우기는 하지 않은 채 판소리만 공부하다가 집안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권삼득의 아버지 권래언의 문집 『이우당유고집』에 실려 있는 「이우당기」에는 자신의 호를 ‘두 가지 근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이우당(二憂堂)’이라고 한 이유 중 하나가 아들 권삼득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둘째 아들 권삼득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술과 음악에 빠졌을 뿐 아니라 타향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사회에서 양반이 판소리를 배운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점이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권삼득은 조선 후기 대표적 명창이었던 하은담(河殷潭), 최선달(崔先達)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는 설이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권삼득은 「홍보가」를 잘 불렀다. 권삼득은 더늠[판소리 명창들이 사설과 음악적 표현을 새로 만들거나 다듬어서 이루어진 판소리 대목. 일명 제(制)라 불림]은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이다. 권삼득은 권마성(勸馬聲)[임금·고관 등의 귀인이 행차할 때, 그들을 수행하는 교군(轎軍)들이 행차의 위세를 더하기 위해 높고 길게 불렀던 소리]가락을 빌려와 판소리화한 덜렁제[판소리 창법의 하나]라는 선율을 개발하였다. 덜렁제는 설렁제, 드렁조, 권마성조, 권조라고도 불린다. 「홍보가」의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 「춘향가」의 ‘군로 사령이 춘향을 잡으러 나가는 대목’, 「심청가」의 ‘남경장사 선인들이 처녀를 사겠다고 외치는 대목’, 「수궁가」의 ‘벌떡게가 여쭈는 대목’, 「적벽가」의 ‘위국자의 노래’ 등에 쓰이고 있다.

덜렁제는 높은 음역의 라(la) 음을 길게 지속하거나, 높은 음 라(la)에서 낮은 음 라(La)로 뛰어내려 라(la) - 라(La), 혹은 라(la) - 솔(sol) - 레(re) - 라(La)와 같은 도약형(跳躍形) 선율을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매우 씩씩한 느낌을 주는 남성적인 창법이다. 권삼득은 설움조 일변도인 여성적인 판소리에 남성적인 덜렁제 창법을 도입함으로써 판소리의 표현 영역을 확대시켰다. 즉 권삼득의 덜렁제 창법은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권삼득에 대한 평가는 권삼득이 살았던 시대부터 있었다. 권삼득은 30대부터 이미 이름이 높은 소리꾼이었다. 권삼득은 1810년(순조 10)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관우희」에는 권삼득이 모흥갑과 함께 젊은 소리꾼으로 이름이 나오고 있다. 당시 권삼득의 나이는 39세였다.

신재효(申在孝)[1812~1884]는 「광대가」에서 권삼득을 “천층절벽 불끈솟아 만장폭포 월렁꿀꿜 문기팔대 한퇴지”라 평가했다. 권삼득을 중국의 문인으로 치면 8대 왕조에 걸쳐 쇠약해진 문(文)을 일으킨 한퇴지(韓退之) 곧 한유(韓愈)와 같은 인물로 평가한 것이다. 그만큼 권삼득의 소리가 높은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우렁차고 힘이 넘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창극사』에서는 “후인의 평으로는 곡조가 단순하고 그 제작이 그리 출중한 것이 없으나, 세마치장단[조금 빠른 3박의 장단형]으로 일호차착(一毫差錯)[아주 작은 잘못이나 어긋남]이 없이 소리 한 바탕을 마치는 것이 다른 사람은 미치지 못할 점일 뿐더러, 그 천품의 절등한 고운 목청은 듣는 사람의 정신을 혼도(昏倒)[정신이 어지러워 쓰러짐]케 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이로 보아 권삼득의 창법은 단순하였으나, 목소리가 매우 크고 좋은 소리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술 및 작품]

권삼득은 판소리 창법인 덜렁제를 만들었다.

[묘소]

권삼득의 묘는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 이목정 오좌에 있다. 2003년 권삼득의 묘역이 조성되면서 본래 묘의 아래쪽으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

전라북도국악협회와 전국 국악인들이 1993년 국창 권삼득 기적비를 전라북도도립국악원 앞마당에 세웠다. 국창 권삼득 국악대제전 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국악협회 완주군지부가 주관하는 국창권삼득선생추모전국국악대제전이 2000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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