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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759
한자 全泰順
영어공식명칭 Jeon Tae-sun
이칭/별칭 태섭(泰燮),창여(昌汝),의당(義堂)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5년(고종 22)연표보기 - 전태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전태순 경기도 고양군 공덕형무소에서 2년 복역
몰년 시기/일시 1961년연표보기 - 전태순 사망
출생지 전태순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자
본관 천안(天安)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전태순(全泰順)[1885~1961]의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본명은 태섭(泰燮), 자는 창여(昌汝), 호는 의당(義堂)이다. 전태순은 1885년 완주군 봉동읍에서 전좌현(全佐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전태순은 종사랑, 임중추원의관, 서주임관 등을 역임했고 창릉(昌陵)의 정자각을 개수할 때 감독을 맡아 공을 세워서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국운이 점차 기울어가고 마침내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관직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독립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갔다. 전태순은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손병희, 이인환, 신석구, 강덕기 등을 만나서 상황을 확인하고 각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 독립선언문을 각지에 배포하면서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당부하던 전태순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전태순은 심한 고문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원수를 갚는 그 날까지 계속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결국 2년 형을 선고받고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 공덕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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