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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766
한자 金炯敏
영어공식명칭 Kim Hyeong-min
이칭/별칭 눌정(訥丁)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7년 5월 12일연표보기 - 김형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6년 6월 21일 - 김형민 경기도 경성부윤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46년 9월 28일 - 김형민 서울특별시장[초대]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형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몰년 시기/일시 1998년 5월 2일연표보기 - 김형민 사망
출생지 김형민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 어전리 738번지[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묘소 김형민 묘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자
본관 김녕(金寧)
대표 경력 초대 서울특별시장

[정의]

근대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정치인.

[가계]

김형민(金炯敏)[1907~1998]은 본적지인 완주군 삼례면 어전리 738번지[봉개마을,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에서 김병권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형민의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호는 눌정(訥丁)이다.

[활동 사항]

김형민은 1916년 삼례의 사립 영신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3·1운동으로 휴교하는 바람에 1920년 전주 신흥학교에 전입하였다. 1924년 고등과를 졸업하고, 큰아버지 김응규(金應圭)의 소개로 전라남도 광주 숭일(崇一)학교 보통과 교원으로 부임하여 1924년 9월 1일부터 1926년 3월 말까지 근무했다. 1926년 9월 하와이 호놀룰루시 이오라니(Iolani)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6월 9일 졸업하고, 미국 본토로 건너가 1928년 9월 15일 오하이오주 웨슬리안(Wesleyan)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1932년 6월 6일 졸업하였다. 그리고 미시간대학 교육과에 입학하여 1933년 6월 19일 졸업하여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933년 8월 귀국하였다. 1934년 9월 문부성에서 중등학교 영어 교원 면허장을 받고, 1935년 5월 10일부터 개성 송도(松都)중학교 교원으로 부임, 영어 과목을 담당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41년 12월 14일[1941년 12월 7일 일본이 기습적으로 진주만을 폭격하고, 바로 다음 날인 12월 8일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33세이던 김형민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불온한 언동을 했다는 혐의로 내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내사 자료인 「송도중학교 교원의 불언언동에 관한 건」[개성경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8권]에 의하면, “하와이에 있는 조선인 동포들이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시작할 것이다”, “해외 조선인들은 미국이 이기고 나면 조선을 독립시키리라 생각한다”, “장개석은 영·미가 자기편이 되어 싸우게 되어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등의 발언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42년의 개성경찰서의 수사보고서에서는 이러한 유언비어 유포가 「육군형법 제99조」 위반이며, 순진한 학생들을 선동, 후방 민심을 혼란시킨 범죄라고 기록하였다[소화 17년 4월 13일, 개성경찰서]. 그리고 사건이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어, 1942년 9월 30일 김민형은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김형민은 해방 이후 귀속재산이던 조선석유조합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다가[『자유신문』, 1946. 6. 27.] 1946년 6월 21일 미군정청으로부터 경성부윤으로 임명되어, 7월 1일 취임하였다[『자유신문』 1946. 7. 2.]. 1946년 9월 경성부가 서울시로 변경됨에 따라 1946년 9월 28일 초대 서울특별시장이 되어, 1948년 12월 14일까지 봉직하였다.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김형민은 정치적 이유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김형민은 시장 시절부터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퇴임 이후 전산불하 과정에서 횡령 혐의 등을 이유로 검찰에 소환되어 수사를 받기도 하였다[『자유신문』 1949. 2. 22.]. 그러나 별일 없이 마무리된 이후, 해방 이후의 석유 기업을 관리한 경험을 살려 삼일사(三一社)의 대표로 석유사업에 전념하였다. 1998년 5월 2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

김형민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오봉산 선영에 매장되었다가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42호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형민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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