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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193
한자 農樂
영어공식명칭 Nongak(traditional Korean music performed by farmers)
이칭/별칭 풍장,풍물,굿,매구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선태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의 타악기, 춤, 연극, 기예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민속예술.

[개설]

농악은 한국에서 공동체로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문화이자 예술이다. 한국의 농악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며,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영동과 영남, 호남의 좌, 우도로 구분되며 제각각 지역적 특성을 보인다.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듯이, 농악은 풍물, 풍장, 매구, 굿 등으로 부른다. 2014년 한국의 농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북농악]

전라북도는 예로부터 농도(農道)로서 농악 활동이 활발한 곳으로 유명하다. 농악은 전라북도 남원시, 완주군, 진안군, 장수군, 임실군 등 산간 지역과 전라북도 익산시, 김제시, 정읍시, 부안군 등 평야 지역으로 구분된다. 지역적 농악을 특성으로 주로 전라북도 전주시를 중심으로 ‘웃녘’과 ‘아랫녘’ 굿으로 호명하던 것이 호남좌도, 우도 농악으로 분리되었다. 현재 전북농악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인 1784년(영조 14) 부안 사례가 가장 오래된 내용이다. 전북농악은 해방 이후 전국농악경연대회를 연거푸 석권하는 최고 실력을 갖춘 고장으로 명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의 농악 관련 문화재 총 33곳 가운데 임실군, 익산시는 국가 문화재, 남원시, 정읍시, 김제시, 고창군, 부안군 등이 전북도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전국에서도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한편, 전북농악 활동 기반은 1950년대 말 출현, 1980년경까지 전국에 인기를 누렸던 ‘여성농악단’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여성농악단은 호남, 특히 전라북도에서 배출된 농악단으로 여성들이 중심이 된 농악단이다. 출현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이 농악을 치는 것은 매우 낯선 모습이었다. 여성농악단은 농악을 중심으로 연희를 하는 단체의 성격을 가진다. 여성농악단은 주로 정읍시를 중심으로 한 농악인들로부터 농악을 전수받았다. 여성농악단은 한국농악사에 이른바 우도농악을 통해 전국화를 시도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로부터 배운 농악인들이 전국 곳곳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완주군의 농악]

완주농악은 지리적인 영향으로 관련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 완주군이 전주를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전북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각각 다른 농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적인 영향 외에도 도시 전주시와 인접하고 있어 전주시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농악활동을 손쉽게 관람할 수 있거나 농악을 전수받을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주농악의 특징은 다양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활동하는 농악들로 완주농악을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을 농악은 여전히 현장에서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완주군에는 완주의 농악단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완주군에 사는 농악인들이 서로 어울려 모둠 져서 대도시 전주시는 물론 다른 지역으로 농악을 치고 다닌 사례가 많았다. 기능이 출중한 농악인들은 농사지어 먹는 수입보다 농악 하며 벌이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완주군의 농악은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1967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에 언급된 대표적인 농악인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장홍덕[1931년생, 조촌면 만성리, 소고], 이정용[1936년생, 조촌면 만성리, 소고], 최영억[1913년생, 상쇠], 손판돌[1906년생, 소양면 대흥리, 장구] 등 총 4명이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만이 전주에서 활동한 것은 아니다. 대개 농악단 구성은 인맥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아직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이 더 많다. 대표적으로 구억리 이채봉, 비봉 내월리 조용산 등이 있고, 진안군 출신이지만 완주군으로 이거 한 송춘화를 빼놓을 수 없다.

완주군의 농악이 더 구체적으로 실체를 보인 것은 1981년 봉성농악계가 만들어지면서부터이다. 당시 면장이었던 신재권을 중심으로 구영철[당시 문화원장]과 강철원이 중심을 이루었다. 당시 농악인으로는 상쇠 오예선, 설장구 오인선, 송춘화 등이 거명된다. 물론 이들만이 농악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써는 완주군 내에서 농악을 잘하는 사람들이 계를 만들어 활동했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완주군에서 농악을 주도하던 농악인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준 것은 1982년, 김형순과 나금추의 등장에 있다. 김형순은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11-3호 이리농악 보유로 지정된 인물이다. 나금추는 여성농악단 상쇠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상쇠로 주목받은 인물이다. 이들과 만난 봉성농악계의 강철원은 당시 이리농악을 주도하던 김형순[장구]과 김용택[상쇠]을 초빙한다. 그리고 ‘봉성농악계’를 ‘봉성농악단’으로 개칭하고, 그들에게서 이영호와 유경옥이 각각 장구와 쇠를 배우면서 완주농악이 새로운 이리농악을 접하게 된다. 완주농악을 대표할 정도의 실력이 출중했던 봉성농악계원들에게는 새로운 농악이 제대로 맞을 리 없다. 농악의 판제라는 것이 순식간에 변화할 수 없는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공간에 농악의 전승은 다소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기존 봉성농악계를 주도하던 이들이 고령화되면서 완주군 고산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뒤안길에 들어섰다.

한편, 봉동읍 용암마을의 경우는 1960년과 1970년대에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용암마을 사람들은 농악을 즐기면서도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1976년도 군농 악대회에 출전해 우승했을 정도이다. 이 밖에도 마을회관 벽에는 농악경연대회 우승기에서부터 농악단 활동사진들이 걸려 있어 옛 농악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주요 활동인물은 육만중, 이종호[소고 정동], 김영식[장구], 백황봉[소고], 최학성[쇠], 성길태 등이 있다. 또한 주변마을 농악인 최만수[쌍계], 유복동[소고, 우산], 강봉의[쇠, 정동], 하기철[상쇠], 하태신[은하] 등이 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활동 내용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봉동의 농악인들이 술멕이 등을 하던 사진에 최학성, 박봉엽, 이종호 등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런 기록에 의하면, 마을 간 기량의 차이가 크고 대회운영이 미숙해 폐지된 것도 한몫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00년대에는 익산농악을 전수받은 유경옥이 지도한 구만리 여성농악단이 창립되기도 했다. 2000년도에 들어서면 봉동풍물패 한얼이 창단된다. 당시 완주문화원은 농악경연대회를 개최해 지역농악 활성화에 노력한다. 봉동풍물패 한얼이 참여해서 매년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2007년도에는 군 대회 우승을 한다. 그해 전북농악경연대회에서도 참가해 3위로 입상하기도 했다. 한편 농악단 가운데에는 고산농악단이 있다. 고산농악단은 이리농악을 전수받아 창립했으며 현재에도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다. 단장 손현배는 지역에도 오랫동안 활동을 해온 농악인이다. 손현배는 현재 완주군 국악협회 지부장을 맡고 있기도 하며, 봉동읍의 아름다운 농악단, 소양농악단, 그리고 삼우초등학교 학생 등을 지도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완주군 농악의 현황]

2018년 현재 완주군에서 활동하는 농악단은 약 17개 단체인 것으로 파악된다. 구체적으로 봉동읍은 봉동풍물보존회, 봉동용암청춘농악단, 아름다운 풍물단, 삼례읍은 삼례농악단, 용진읍은 용진농악단, 상관면은 상관여성농악단, 이서면은 콩쥐팥쥐농악단, 소양면은 소양농악단, 구이면은 화원마을농악단, 고산면은 고산농악단, 비봉면은 달이실풍장패와 칠채굿농악단, 운주면은 운주농현농악단, 동상면은 동상농악단이 있다. 농악단들은 읍면 단위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때로는 면 단위 단체가 활동을 중지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농촌에 기반을 둔 읍면 단위의 인구는 많지 않고, 고령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농악단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소략하다. 다만 2016년도 조사자료에 의하여 단체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례면 삼례농악단, 상관면 신리와 여성농악단, 고산면 신상마을, 구이면 계곡리 미치, 항가리, 경천면 경천리, 동상면 수만리 학동신월리와 원신마을, 운주면 고당리, 구제리, 완창리, 이서면 모고지, 남계리 신리마을, 상개리, 화산면 마을농악단 등이 있다. 아직은 마을별 농악단의 활동 내용이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지만, 자료를 통해서 마을 농악이 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봉동읍 용암청춘농악단[단장 백황봉]의 경우, 마을 주민들이 연로하고 참여인구가 조금씩 줄고 있으나, 예로부터 농악 활동이 왕성했던 마을 명성에 부합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농악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많은 수의 농악단이 파악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통해서 마을 농악이 전승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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