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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361
한자 普德和尙-飛來方丈-景福寺址
영어공식명칭 Biraebangjang Temple of Bodeokhwasang and Gyeongboksa Temple Site
분야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하태규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에 머물렀던 보덕화상비래방장경복사지.

[도입] 보덕 방장을 날려와 고덕산에 경복사를 창건하다.

경복사지는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1번지 일원에 해당하는 광곡리 화원마을평촌리 상하보 마을을 잇는 고덕산 기슭에 있다. 고덕산은 전라북도 전주시와 전라북도 완주군에 걸쳐 있는데, ‘고대산’, ‘고달산’이라고도 한다. 경복사지는 해발 고도 603m인 고덕산 남쪽 사면의 ‘북골’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다.

경복사는 고구려에서 망명한 보덕화상이 창건한 열반종의 중심 도량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보장왕] 9년 여름 6월에 반룡사의 보덕화상이 국가가 도교를 숭상하고 불법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남쪽으로 완산 고대산으로 옮겼다”라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보덕 이암조’에는 고구려 반룡사에 있던 보덕화상이 보장왕 즉위 이후 연개소문이 도교를 숭상하자, 도교가 불교와 대치하여 국운이 위태롭게 될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했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신력으로써 방장을 날려 남쪽으로 완산 고대산에 옮겨서 거기에서 살았다는 것이며, 보덕이 방장을 날려 완산고대산[고덕산]으로 이주한 시기는 백제가 망하기 전인 영휘(永徽) 원년[보장왕 9년, 650년]이라고 서술하고, 뒤에 백제가 망한 뒤 고구려가 망하기 1년 전인 건봉(乾封) 2년[보장왕 26년, 667년]이라고 한다는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남행월일기에는 보덕이 고구려에서 반룡산 연복사에서 주석하고 있다가, 고구려가 도교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숭상하지 않으므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상하고 피난할 곳을 물색한 끝에 제자 명덕의 권유로 전주의 고달산으로 당을 날려 내려왔으며, 그 시기는 건봉 2년(667)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개 1] 보덕의 고구려에서의 활동과 망명

보덕은 망명 전 고구려에서 종교적·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고려 영탑사조에 의하면, 평양성에 살던 보덕은 산승의 권유에 못 이겨 나아가 열반경 40권을 강의하고 이를 배경으로 영탑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 영탑사는 평양성의 서쪽 대보산에 있었다고 한다. 팔면 칠층석탑이 있을 것이라는 신인의 예언과 영탑사 창건의 설화는 당시 보덕의 사상적 위치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는 연개소문의 집권과 도교 장려 이전의 사실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보덕은 이 영탑사의 주지가 되어 고구려의 불교를 열반경을 중심으로 이끌어 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다시 반룡산 연복사로 옮겨 머무르면서 열반경을 강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떠한 연유로 영탑사에서 연복사에 주석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추측건대, 연개소문 정권의 도교 숭상에 관련하여 세력이 밀린 것으로 파악된다. 고구려 영탑사에서 연복사로의 이주 자체가 먼저 보덕을 반고구려적 인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당대의 열반학이 보덕에게서 전해진 것으로 찬양하고 원효와 의상도 보덕에게서 배운 것으로 말하고 있다.

앞에서 보덕이 남쪽으로 망명하게 된 것은 연개소문의 도교 숭상에 대한 불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보덕의 백제 망명이 단순히 도교와 불교 간의 사상적 갈등에 따른 것만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보덕 망명기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한 고구려에서는 당과의 대립 속에서도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를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교섭을 벌이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 25년(642)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으로 나아갔다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백제는 의자왕 대로서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성주였던 김품석 부부를 죽이는 등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에서 김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였으나 외교적 교섭이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당 태종은 645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안시성에서의 패전으로 인하여 퇴각하였는데, 이러한 당에 648년 신라의 김춘추가 건너가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나당연합을 성립시키면서 삼국의 정세는 매우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보장왕 2년(643)에 왕에게 ‘당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와 국인에게 가르치자’라고 청하였다. 이에 따라 보장왕은 당나라에 표문을 올려 도교를 청하였고, 당의 태종은 도사 숙달 등 8인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의 도덕경을 주자, 기뻐하여 승려들의 사찰을 취하여 그들의 도관으로 삼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면 연개소문의 도교 숭상과 당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는 당시 국제 역학관계를 고려한 다분히 정치적 외교적인 목적이 가미되어 있음을 배제하기 어렵다. 고구려의 대당 강경책 속에서 연개소문은 도교 수용을 빌미로 당과의 관계 개선을 노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떻든 그 결과는 사찰이 도교의 도관이 되는 등 불교는 탄압을 받는 것이 되었을 것이고, 당시 불교계의 지도자였던 보덕으로 볼 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 보덕이암의 기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보덕이 ‘도교가 불교와 대치하여 국운이 위태롭게 될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라고 한 것에서 보면, 국왕에게 직접 수차례 간언을 할 정도로 보덕의 위상에 반하여 그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전개 2] 보덕화상 방장을 날려 망명하다.

‘[보장왕] 9년 6월에 결국 보덕은 국가가 도교를 받들고 불법을 믿지 않는다’라고 하여 불만을 품고 반룡사로부터 신통력으로 방장을 날려 완산 고대산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당시 당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신라와 그러한 외교 관계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연개소문의 친당 노력이 도교 숭배에 불만을 느끼고 망명길에 올랐다면 결국 백제로 방향이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백제에는 계율 사상, 미륵신앙, 관음신앙, 열반 사상 등 다양한 불교사상이 전개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고 불교를 이용하여 국가 중흥을 도모하는 등 불교 숭배의 분위기가 팽배하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당과 연합한 신라에 대한 의자왕의 강경책이 전개되고 있어서 보덕의 망명지 결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덕이 망명지로 선택한 백제는 10년 뒤 멸망하고 신라에 편입됨으로써, 보덕은 또 한 번 사상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덕이 설파한 ‘누구나 다 불성을 가지고 있고 성불할 수 있다’라는 열반경을 중심으로 평등사상은 백제 지역 유민에게 정신적 위안이 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사상은 백제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보덕의 열반종은 신라의 중앙보다는 백제 지역에서 크게 환영을 받으며 발전하였으며, 보덕은 이러한 열반종의 종주로서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은 그가 주석한 경복사가 위치한 고대산의 그 지리적 조건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던 점과 보덕의 제자 11인이 창건했다고 하는 사찰들의 위치가 모두가 구 백제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덕경복사와 열반사상은 통일신라 당시 구 백제 영역 통치의 중심이 되는 전라북도 완주군 지역주민의 정신적 위안이 되는 사상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전개 3] 보덕이 열반종을 개창하고 법맥이 이어지다.

삼국에 불교가 전래한 이후 신라 통일기 교학 불교의 전성기를 맞아 당대의 걸출한 고승들이 출현하였다.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때 통도사를 중심으로 계율종을 이끌었으며, 이어서 무열왕 때 고구려로부터 백제 땅으로 망명한 보덕이 이곳 경복사를 중심으로 열반종을 새로 세웠다. 보덕화상의 열반 사상은 뒤에 문무왕 때 분황사를 중심으로 법성종을 강론하였던 원효나, 부석사에서 화엄종을 열게 되는 의상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승려였던 원효와 의상이 [경복사에 있던] 보덕을 찾아와 그가 강의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원효와 의상이 직접 『열반경』과 『유마경』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은 보덕의 당시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또 당시 경복사는 외부에서 많은 승려가 와서 열반 사상을 공부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승려교육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원효의 저술 속에는 『열반경종요』 1권이 포함되고 있는데, 이 또한 보덕의 사상적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 대표적인 문인인 최치원의 저술 속에 세 명의 승려에 대한 화상전(和尙傳)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법장화상전』, 『부석화상전』과 더불어 『보덕화상전』이 그 목록에 있다는 사실이다. 『보덕화상전』의 내용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가 중국 화엄의 대가인 현수법장과 해동화엄의 초조인 의상과 함께 보덕화상에 대한 전기를 지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보덕화상에게는 11명의 덕이 높은 제자가 있어서 그 중 무상화상은 제자 금취 등과 함께 금동사를 세웠고, 적멸, 의융 두 법사는 진구사를 세웠으며, 지수는 대승사를 세웠고, 일승은 심정, 대원 등과 함께 대원사를 세웠고, 수정은 유마사를 세웠으며, 사대는 계육 등과 함께 중대사를 세웠고, 개원화상은 개원사를 세웠고, 명덕은 연구사를 세웠다. 이러한 9개의 사찰은 보덕이 주도하는 열반종의 도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의하면 보덕과 그 문도들에 의하여 『열반경』을 소의경전으로 한 열반종의 활동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있어서도 보덕의 영향력이 대단하였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대각국사 의천이 직접 경복사를 찾아 보덕의 영정에 예를 취하고 시를 지었으며, 보덕이 고구려에서 주석하였던 반룡산 연복사를 찾아 시를 지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의 교종을 대표하는 승려일 뿐만 아니라, 선종과 교종을 하나로 회통시킨 한국의 대표적인 승려이다. 그가 보덕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경복사를 찾아와 예를 올리고 시(詩)를 지었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에서 차지하는 보덕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중대한 징표이다. 또 그가 『열반경』을 번역하여 강의했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면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또한 고려시대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이규보의 남행월일기를 비롯한 시문 등 각종의 사서와 문집에 그 내용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온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복사는 신라 이후 고려시대에도 저명한 명소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시대에까지 보덕과 열반종의 영향력은 대단하였으며, 경복사는 열반종의 중심도량으로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세종 6년(1424) 선교양종으로 통폐합될 당시 36사의 하나로 경복사가 지정되었다. 당시 36사 중에는 정부에서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각각 18사찰씩을 분속(分屬)하여 준 것으로, 당시 경복사가 교종의 대표적인 18사찰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록 숭유억불 정책으로 교세가 다소 미약해지기는 했지만, 당시 나라에서 승려의 수 및 토지의 결 수를 정할 때만 해도 경복사의 승려 수는 70명, 전지는 50결이나 되는 대찰(大刹)이었다. 그러나 곧 예조의 계에 따라 경복사를 상원사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사실은 문헌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로부터 경복사는 사세가 다소 약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경복사는 1974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 결과 ‘고덕산경복사만력사십□(高德山景福寺萬曆四十□)’ 명문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1612년에 중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2000년 발굴조사에서는 ‘숭정구년(崇禎九年)’ 명문와가 다시 발견되어 이 절이 1636년까지 분명히 존속되고 있었음을 입증하였다. 또한 1799년 편찬된 「범우고」에 경복사가 존재한다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도 법맥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결말] 경복사가 폐찰되고 절터만 남다

경복사는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고, 그 위치마저도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1976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상하보마을에서 광곡리 화원마을로 넘어가는 고덕산 자락의 구릉 상에 있는 절터에서 ‘경복사’ 명문의 기와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경복사터임이 확인되었고, 1999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시행한 지표조사 결과 그 중심구역으로 추정되는 유구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그 가람의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며, 와편 등 유물 산포지역이 대단히 광범위하게 나타나 그 정확한 사역도 확인하기 어렵다.

사지로 전해지는 지역의 북동쪽에는 ‘농막’으로 불리는 폐가가 있고, 이 주변에는 석축과 조선시대의 자기와 와편이 흩어져 있다. 농막의 기단과 주초석 중에는 시기가 오랜 것들이 있어서 절터에 있던 것들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막의 서남쪽에는 거대한 깬 돌을 이용한 석축이 있는데. 이 석축에는 석빙고로 전해지는 배수시설이 있다. 이들 석축과 농막의 주변에는 다수의 와편들이 흩어져 있고, 깬 돌을 이용한 석축의 좌우측에는 산죽이 촘촘하게 자라고 있다. 농막의 북쪽으로는 크지 않은 할석을 이용한 석축이 보이며, 이 석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대지 위에 민묘가 설치되어 있다. 산의 경사면이 상대적으로 낮은 서쪽 부분과 높은 동쪽 부분의 높이 차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대지를 구성하는 석축의 서쪽 부분은 동쪽 부분보다 석축의 높이가 높고 석재도 큰 것들이다. 민묘가 있는 대지의 북쪽으로는 샘이 있다. 농막의 서남쪽 아래 경사면으로는 군데군데 석축에 의하여 형성된 대지가 있어서 이 영역까지도 경복사의 터였음을 알려 준다. 현재 고달산 경복사 주변에는 20여 개의 건물지가 있으며, 사찰의 형태는 사라지고 없다.

경복사지는 2000년 11월 17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0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문화재청이 지원하는 폐사지 조사 사업에 의하여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2차례의 시·발굴조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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