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718
한자 李三晩
영어공식명칭 Lee Sam-man
이칭/별칭 윤원(允遠),창암(蒼巖),강암(强巖),강재(强齋),강재(剛齋),규환(奎煥)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70년(영조 46)연표보기 - 이삼만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47년(헌종 13)연표보기 - 이삼만 사망
출생지 이삼만 출생지 - 전주시 교동(校洞)
거주|이주지 이삼만 거주지 -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지도보기
활동지 이삼만 활동지 - 전주|완주
묘소 이삼만 묘소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지도보기
성격 서예가
성별 남자
본관 전주(全州)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에 거주했던 서예가.

[개설]

이삼만(李三晩)[1770~1847]은 서울의 추사 김정희, 평안도 눌인 조광진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서예가이다.

[활동 사항]

이삼만의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蒼巖),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처음 이름은 규환(奎煥)이었다. 이삼만은 1770년(영조 46)에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삼만’이라는 이름은 만학(晩學), 만교(晩交), 만혼(晩婚)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이름이라고 한다. 이삼만은 전주시 교동에서 살다가 완주군 상관면(上館面) 죽림리(竹林里)로 옮겨 살았다. 이삼만은 평생 부귀공명(富貴功名)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직 서예에만 전념하였다. 어린 시절,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익혔는데, 포(布)를 누여가면서 연습하였으며, 심지어 병을 앓고 있는 중에도 하루 1천 개의 글씨를 썼다고 한다. 이삼만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전주의 한약 건재상(乾材商)이 대구약령시(大邱藥令市)에 가서 살 약재(藥材)의 이름을 이삼만에게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후 건재상은 이삼만이 써 준 글씨를 가지고 대구약령시에 가서 약재를 사는데, 마침 이삼만이 쓴 글씨를 본 중국인 약재상이 깜짝 놀라며 누구의 글씨냐 하고 물었고, 건재상이 이삼만이라고 답을 해 주었다. 그로부터 이삼만의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고 중국인 제자가 생겼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이삼만의 비문에 등장하고 있다. 김정희(金正喜)는 1840년(헌종 6) 제주도로 귀양 갈 때, 전주에 이르러 전라도관찰사 이목연(李穆然)에게 부탁하여 객사(客舍)에서 이삼만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때 김정희는 이삼만의 글씨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삼만이 서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유수체(流水體)를 꼽는다. 서홍순(徐弘淳) 등 많은 제자가 이삼만으로부터 글씨를 배우고 익혔다.

[저술 및 작품]

이삼만의 글씨는 지리산 칠불암(七佛庵)과 천은사(泉隱寺)의 편액(扁額), 그리고 전주 남고진 사적비(南固鎭事蹟碑), 전주 제남정(濟南亭) 편액 등이 있다. 완주군 내에는 추사와 함께 쓴 비석, 정부인광산김씨묘비김양성묘비가 있다.

[묘소]

이삼만의 묘소는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完州郡 九耳面 坪村里)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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