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772
한자 吳貞淑
영어공식명칭 O Jeong-suk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동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오정숙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4월 4일연표보기 - 오정숙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지정
활동 시기/일시 1992년 - 오정숙 한국예술문화 공로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2000년 - 오정숙 대통령 훈장
몰년 시기/일시 2008년 7월 7일연표보기 - 오정숙 사망
출생지 오정숙 출생지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
거주|이주지 오정숙 거주지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지도보기|익산시 남중동
묘소 오정숙 묘소 -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 773-5 산 107-10
성격 예술인
성별 여자
본관 해주(海州)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에서 활동한 여류 명창.

[개설]

오정숙(吳貞淑)[1935~2008]은 아버지 오삼룡(吳三龍)과 어머니 문설앵(文雪鶯)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원래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는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이지만, 큰집이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이며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거주지는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라고 할 수 있다. 오정숙은 김연수의 수제자로서 열네 살 때부터 김연수를 따라 활동하면서 김연수제[동초제] 판소리 다섯 바탕을 오롯이 전승하였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 발표회를 하여 여류 명창으로서는 처음으로 다섯 바탕을 완창한 소리꾼이 되었다. 1977년부터 20년 동안 국립창극단 단원과 지도위원으로서 수많은 창극에 출연하였는데, 「춘향가」의 월매 역으로는 박초월 이후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립창극단을 나온 오정숙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동초각’이라는 집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활동 사항]

오정숙은 아버지 오삼룡이 국악을 좋아하셨을 뿐만 아니라, 쇠[꽹과리]와 시조를 잘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우리 음악에 접할 수 있었으며, 별다른 교육을 받은 바 없었어도 곧잘 우리 음악을 흉내 내곤 했다. 열네 살 때 아버지가 평소 친교가 있던 명창 김연수 선생께 오정숙을 데리고 가서 소리를 가르쳐 주도록 부탁한 것이 평생 소릿길에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오정숙은 김연수를 따라다니면서 소리 공부도 하고, 연극도 하고, 춤도 배웠다. 이때 박옥진, 성창순과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오정숙이 몸담았던 공연 단체는 박동실이 만들었던 아성창극단, 김연수가 만든 김연수창극단, 우리국악단 등이었다. 이런 단체에서 오정숙은 심청이나, 흥보 막내아들 역할을 했는데, ‘천재 소녀’라는 말을 들었다. 열아홉 되던 해에는 김연수 문하를 떠나 삼성이라는 여성국악단에 들어갔으나, 몸이 좋지 않아 소리를 쉬고 전주에서 음식점을 하면서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소리를 시작한 것은 서른세 살 되던 1967년이었다. 이때는 김연수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때인데, 김연수의 전수생으로 들어간 오정숙은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에 임하게 된다. 김연수 선생을 모시고 익산시 남중동 남성고등학교 앞 소나무 숲인 소라단에 있는 제각에서 백일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오정숙은 김연수 선생과 함께 세 차례, 혼자 네 차례 등 총 일곱 번에 걸친 백일공부를 하였다. 백일공부를 성공적으로 마친 오정숙은 1972년부터 완창 발표회를 하기 시작한다. 1972년 「춘향가」, 1973년 「흥보가」, 1974년 「수궁가」, 1975년 「심청가」, 1976년 「적벽가」를 발표하였다. 1974년 「수궁가」를 발표하던 날은 김연수가 별세한 날이었다. 「적벽가」는 다 배우지 못했었기 때문에 녹음을 통해 배워서 발표회를 했다. 이렇게 해서 오정숙은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한 최초의 여류 명창이 되었다.

1975년 ‘전주 대사습놀이 전국대회’가 부활하자 첫 번째 경연대회 때 오정숙은 강도근, 홍정택, 임준옥 등과 겨루어 당당히 일등을 하여, 나이 41세, 소릿길에 들어선 지 꼭 27년 만에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 그 후 오정숙은 1983년에 광주에서 열린 제1회 남도문화제 판소리 특장부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84년에는 KBS 국악대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에는 동리대상, 2000년에는 대통령 표창, 2007년에는 방일영국악상을 수상하였다. 1982년에는 준문화재가 되었고, 1991년 4월 1일 마침내 김연수의 뒤를 이어 동초제 「춘향가」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오정숙은 1977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3년에는 국립창극단 지도위원이 되었다. 오정숙은 20년 동안이나 국립창극단 단원으로서, 지도위원으로서 창극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오정숙은 이때 뛰어난 연기력과 소리 실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춘향가」의 월매 역으로는 박초월 이후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립창극단을 나온 오정숙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스승인 동초 김연수 선생님의 아호를 딴 ‘동초각’이라는 집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러다가 익산으로 이사를 하여 말년은 익산에서 보냈다. 오정숙의 판소리는 정확한 사설, 분명한 발음, 정교한 너름새를 특징으로 한다. 연극성이 극대화된 김연수의 판소리를 이어받은 오정숙은 무대에서 관중을 휘어잡는 능력으로는 당할 자가 없었다.

오정숙은 동초제 판소리 보존회를 만들어 스승인 김연수 선생의 판소리를 전승하는 데 힘썼는데, 뇌졸중으로 쓰러진 날도 김연수 명창의 고향인 고흥군과 고흥군민의 날 행사 협의차 갔다가 변을 당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오정숙은 순천 성가를로병원에 입원했다가 원광대학교 병원으로 옮긴 후 2008년 7월 7일 별세하였다. 향년 74세였다. 7월 13일 오정숙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 스승 김연수의 묘 아래에 묻혔다. 오정숙의 제자들은 주로 전주 일원에 퍼져 있다. 전주 일원은 오정숙이 퍼뜨린 동초제 판소리의 근거지라고 할 만하다. 서울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에서도 소리를 지도했으며, 제자 중에서 이일주, 조소녀, 민소완, 김명신, 김소영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고, 방성춘은 광주시, 고향임은 대전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그 외에 각종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사람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른다. 제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판소리 명창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수는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김연수에 의해서 시작된 동초제 판소리는 오정숙을 통해 왕성하게 자라나 이제는 우리 판소리를 대표하는 소리가 되었다.

[저술 및 작품]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다섯 바탕』-흥보가[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89]

『오정숙 판소리 다섯 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북 : 김청만], 신나라뮤직[1996~2001]

[묘소]

오정숙의 묘소는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 773-5 산 107-10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오정숙은 1991년 4월1일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지정받았으며, 1992년에는 한국예술문화 공로상, 2000년에는 대통령 훈장 등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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