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아산문화대전 > 아산향토문화백과 > 삶의 내력(역사) > 근현대 >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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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충청남도 아산의 전반적인 변화상.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아산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에는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에 미소(美蘇) 양군이 들어와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광복 직후 아산에서는 8월 15일 아산군수 정홍섭(鄭泓燮)이 행정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시국 대책 방안을 마련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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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침공으로 충청남도 아산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 후 북한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7월 7일 아산에 진입하여 9월 말까지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 9월 29일 국군과 유엔군이 아산 지역을 수복하였고, 이후로는 북한 인민군의 침입을 더 이상 받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아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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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18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둔포리[현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에 머무르던 피난민들이 미군기의 무차별 폭격에 희생당한 사건.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 병력은 남쪽으로 후퇴를 시작하였다. 12월 24일 흥남부두에서 마지막 철수 선박이 병력과 피난민을 태우고 떠났으며, 이듬해인 195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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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10일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현 아산시 신창면] 한티고개에서 벌어진 경찰과 북한 인민군 간의 전투.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 후 북한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였고, 7월 6일 충청남도 천안까지 내려왔다. 북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참전한 미군은 7월 8일까지 이틀간 천안에서 북한 인민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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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시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건. 6·25전쟁 기간 동안 충청남도 아산에서도 민간인을 대상으로 여러 건의 학살사건이 자행되었다. 민간인 학살사건은 크게 북한 인민군이나 좌익 세력에 의해 일어나거나, 북한 인민군 퇴각 이후 부역자 처단을 명목으로 반공 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자행하였다. 한편으로는 미군의 오인에 의한 학살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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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충청남도 아산 지역이 북한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온양중학교 학생과 교사를 중심으로 결성한 비밀 반공 단체. 북한 인민군이 아산 지역을 점령하면서 부역·약탈·학살 등을 일삼게 되자, 반공 의식을 갖게 된 온양중학교 학생과 교사들은 인민군의 만행을 방지하기 위해 비밀결사 조직인 태극동맹(太極同盟)을 만들게 되었다. 태극동맹은 온양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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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머무르던 피난민들이 임시로 거주하던 거처. 6·25전쟁 당시 아산 지역에는 피난민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특히 1951년 1·4후퇴를 전후한 피난민의 남하 과정에서 아산 지역은 주요 피난 경로 중의 한 곳이었다. 전쟁 초기 북한 인민군의 주요 남침 경로가 천안~대전 가도[지금의 국도 1호선]였으므로 전쟁의 주요 지역에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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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을 위해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만들어진 수용소. 6·25전쟁 당시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는 피난민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특히 1951년 1·4후퇴를 전후한 피난민의 남하 과정에서 아산 지역은 주요 피난 경로 중의 한 곳이었다. 전쟁 초기 북한 인민군의 주요 남침 경로가 천안~대전 가도[현재 국도 1호선]였으므로 전쟁의 주요 지역에서 비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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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이후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사회의 변혁·개량이나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시민 주도로 전개된 운동. 정부의 다양한 정책 운영에 대하여 충청남도 아산 지역 주민들은 다양한 형태로 적극적인 참여 혹은 반대 의사를 보여 주었다. 정책 결정에 대하여 동조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시민 중심의 정책 결정이 아니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성명, 시위, 단체 조직 등의 다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