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1393
한자 報本齋記
영어공식명칭 Account of Bobonja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11년 - 「보본재기」이상정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81년 - 「보본재기」이상정 사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53년연표보기 - 「보본재기」저술
편찬|간행 시기/일시 1802년연표보기 - 「보본재기」간행
배경 지역 「보본재기」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지도보기
성격 잡기류|기
작가 이상정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이상정이 지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있는 보본당 별묘에 대해 적은 기문.

[개설]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상정은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구성]

「보본재기」는 크게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있다. 서두에 근본에 보답하는 예(禮)인 제사의 일반론과 변례(變禮)에 대해 설명하고, 이어서 이를 잘 실행한 실례(實例)를 들며 후세를 독려하고 있다.

[내용]

「보본재기」는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은거하던 최흥원의 부탁으로 지은 최흥원 선조인 최동집의 신주를 모신 보본당 별묘에 관해 쓴 기문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선왕이 근본에 보답하는 예를 제정하여 시조에게 보답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펼 수 있게 하였는데, 지위의 귀천에 따라 예법의 고하를 달리 하여 대부(大夫) 이하로는 4대 이상을 제사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예로 조절하여 중도(中道)로 귀결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조상 중에 큰 공덕으로 자손에게 은택을 내려주어 추모하는 예를 대번에 그만둘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체천하지 않는 조상이 이에 해당한다. 기업을 처음 시작한 시조를 말하는 것인데, 터전을 옮겨 기업을 닦아 후손을 편안하게 해주거나 아름다운 인덕(仁德)으로 후손에게 복을 남겨준 조상이 계시면 자손의 입장에서 높이 보답해 섬길 도리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간혹 이를 잘못 받아들여 불천위(不遷位)의 제도를 써서 5대를 봉사하여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는 사대부들이 있다.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할 수는 없으므로 별묘(別廟)에 봉안하고 제사의 빈도를 조절하니, 이는 예문에 없는 예이면서도 중도에 맞는 것이다. 옻골마을에 은거하던 최흥원이 별묘를 세우고 선조인 대암공 최동집의 신주를 조천(祧遷)하였음을 고하였다. 이는 변례이므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상세히 고한 것이다. 최흥원이 선조인 대암공은 아름다운 절개와 두터운 덕은 백세토록 제향받기 충분하고, 또한 터전을 옻골로 옮겨 기업을 닦은 공이 있으니 자손의 봉사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최흥원이 효자의 마음가짐으로 정도를 지키며 예를 실천하였으니, 더 이상 권면하고 경계할 것이 없다.

[특징]

「보본재기」는 보본재가 가지는 의미를 예학(禮學)의 관점에서 잘 설명하고 있고, 다소 어려운 예의 법식을 간략하면서도 쉽게 설명해놓았다.

[의의와 평가]

「보본재기」는 당대 영남지방의 예론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예를 변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예학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