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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부사오한손공행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1415
한자 昌原府使聱漢孫公行狀
영어공식명칭 Changwonbusa Ohansongong Haengja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81년 - 「창원부사오한손공행장」이익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63년 - 「창원부사오한손공행장」이익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922년연표보기 - 「창원부사오한손공행장」간행
배경 지역 「창원부사오한손공행장」 -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 지도보기
성격 전장류|행장
작가 이익

[정의]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이 임진왜란 때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의 공산성을 수비한 손기양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지은 행장.

[개설]

이익(李瀷)[1681~1763]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이다. 이익은 실용적인 학문을 주장하였다. 즉 당색 중심 정치를 타파하고 관료기구의 개편을 주장했다. 또한 양반도 생업에 종사해야 함을 피력했다. 또한 인재 등용도 종래 과거제도 외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 채용하는 공거제(貢擧制)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손기양(孫起陽)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聱漢)·송간(松磵)이다. 손기양은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88년(선조 2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성현 찰방(省峴察訪)을 맡고 있을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대를 모아 역마(驛馬)를 적절히 배치하면서 왜적을 막아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관찰사가 왕의 호종을 위해 떠나버리자, 관찰사를 대신해 공산성을 지켰다. 손기양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정구와 돈독한 관계였다. 또한 정경세·조호익·이윤·이전·이준 등 영남 명유들과 교유했다. 저서로는 『배민록(排悶錄)』 2권, 『철조록(輟釣錄)』 1권 등이 있다.

[구성]

「창원부사오한손공행장(昌原府使聱漢孫公行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서두에는 손기양의 세계(世系), 손기양의 총명한 자질과 약관의 나이에 이룬 풍부한 학식에 대해 칭송하고 있다. 중간 단락은 손기양이 세운 공로를 시대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마지막 단락은 손기양이 가진 선비로서 면모를 알 수 있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내용]

「창원부사오한손공행장」을 요약한 내용이다.

공[손기양]의 휘는 기양(起陽)으로, 자는 경징(景徵)이다. 손씨(孫氏)의 선조는 진한(辰韓) 육부(六部) 대인(大人)의 하나이다. 신라(新羅)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때에 이르러 대수부(大樹部)를 점량부(漸梁部)로 고치고 손씨 성(姓)을 하사하였다. 고려(高麗) 때 긍훈(兢訓)은 공로로 광리군(廣理君)에 추봉되었다. 광리(廣理)는 밀양(密陽)의 옛 이름이고, 이에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한 자질을 지녔고 약관의 나이에 학식이 이미 풍부하였다. 칠경문과(七經文科)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유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성주향교 교수에 제수되었다.

왜란(倭亂) 와중에도 고통받는 백성을 위로하고 군국(軍國)의 일에 부응하여 성실하고 근면하다고 일컬어졌다. 이듬해 본도의 방백(方伯)을 따라 공산성(公山城)에 들어가서 수비하였다. 또 이듬해 왜적이 다시 침입하자, 방백이 근왕(勤王)을 핑계로 성을 버리고 가니 공은 성을 방어할 수가 없었다. 이에 『공산지(公山誌)』를 지어 충분(忠憤)한 마음을 부쳤다.

외직으로 나가 경주제독과 울주판관 등에 제수되어 혁혁한 공로를 쌓았고, 양친이 돌아가시자 자식 된 도리를 다하여 상을 치렀다. 관직에서 물러나 도학을 밝히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힘썼다. 이후에도 품계를 올려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으나 당파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선비의 지조를 지켰다. 공은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후하였으나 시비를 가릴 때에는 늠름하여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고, 평소에 『논어』와 『주역』을 탐독 퇴계의 예설을 직접 써서 몸을 단속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로 삼았다.

[특징]

「창원부사오한손공행장」은 행실과 공로를 단순히 시대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다각도로 손기양의 삶을 고찰한 흔적이 글에 드러나 있다.

[의의와 평가]

「창원부사오한손공행장」은 조선후기 실학자를 대표하는 이익의 문학에 대한 일면을 알 수 있다. 휘황찬란하게 글을 꾸미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면서 문학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행장의 구성력을 높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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