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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 개정 사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06
한자 市區 改定 事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4년 10월 12일연표보기 - 시구 개정 사업 시작
성격 도시계획

[정의]

1910년대에 대구에서 시행된 일종의 도시계획.

[개설]

시구 개정 사업은 도시계획법의 제정·실시에 앞서 과거 일본에서 1870년대 초부터 1910년대 말까지 영국의 도시계획·도시재개발을 본떠 시가지의 불연화(不燃化)[건물을 지을 때 불에 잘 타지 않는 재료를 쓰는 것]와 서양풍(西洋風)을 꾀한 일종의 도시개발계획이다. 1910년대의 대구에서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시구 개정 사업’의 이름으로 도시계획을 추진하였다.

[목적]

시구 개정 사업은 1910년대 대구의 공간을 식민도시로 재편할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변천]

대구의 시구 개정 사업은 1914년 10월 12일자 통첩 제3690호 「지방시구개정에 관한 건」이 정무총감 명의로 각도 장관에게 시달되면서 추진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시구 개정 사업은 한일병합 이전 대구성의 훼철과 도로 건설, 경상감영 공간의 해체에 이은 일본인 중심의 시가지를 구성할 계획으로 추진되어 가로 예정선도 일본인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측면에서 확정하였다.

대구의 시구 개정 사업은 1914년 10월 12일자 통첩 제3690호 「지방시구개정에 관한 건」이 정무총감 명의로 각도 장관에게 전달되며 추진되었다. 하지만 대구의 시구개정사업은 그 이전부터 대구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추진되고 있었다. 곧 1910년에 총독부는 대구이사청을 폐지하고 대구군대구부로 개칭하였으며, 행정구역은 옛 대구군의 관할구역과 같게 29면 260동으로 구성하였다. 1911년 11월에 시가지 일부 동명을 변경하였고, 1914년 4월에는 대구부의 관할구역을 2개의 면으로 대폭 축소하였다. 나머지 구역은 모두 경상북도 달성군으로 편성하였다. 시구 개정 사업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1918년에는 달성군의 봉덕동, 대명동 일부를 다시 대구부역에 편입시켰다.

시구 개정 사업이 종료되는 1910년대 말 대구는 크게 2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일본인 공간과 조선인 공간으로 이원화되었다. 그에 따라 1910년대 말 대구의 도심부인 옛 성곽 내의 중북부 일대와 성곽 밖의 동부[오늘날의 동인동 일대와 대구역전통에서 도원동, 시장북로까지]를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조선인은 옛 성곽 내의 남부, 그리고 성곽 밖[오늘날의 덕산동, 남산동]에서 서남부의 구릉을 따라 북향[내당동, 비산동 일대]을 차지하였다. 이처럼 대구는 민족별로 뚜렷한 공간 구분 현상이 완료되었다. 특히 일본인의 공간은 직교식 가로망을 보이고 조선인의 공간은 좁고 굽은 미로 형태를 보여 대조적이었다.

[의의와 평가]

시구 개정 사업은 1910년대에 대구가 추진한 일종의 도시계획이었으나, 한일병합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일본인 사회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면서 일본 우위의 도시 구조로 재편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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