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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환필화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65
한자 張仁煥 筆禍事件
이칭/별칭 대구서원 폭행 사실 보도 사건,순사발검 기사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사회운동

[정의]

1931년 대구경찰서 이치가와 순사의 조선인 상해 사건을 보도한 장인환이 일제 관헌에게 탄압받은 사건.

[역사적 배경]

장인환 필화사건대구경찰서 이치가와[市川] 순사의 민간인에 대한 상해 사건이 발단되었다. 그 과정을 보면 대구경찰서 소속의 이치가와 순사가 1931년 6월 10일 오전 1시 무렵 대구 서성정 1정목[현재 서성로1가]에서 청각장애자 최봉조(崔鳳祚)를 보고 행동이 수상하다며 경찰서로 데려가려 하였다. 이에 최봉조가 연행을 거부하자 이치가와 순사가 칼을 뽑아 최봉조의 가슴을 찌르는 살인행위를 저질렀다. 최봉조는 긴급히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조선일보 대구지국 이선장(李善長) 기자는 곧바로 기사를 작성해 본사에 송고할 참이었다.

[경과]

보도 사실을 알게 된 대구경찰서 김모 순사부장이 돈을 들고 조선일보 대구지국을 찾아와 지국장 겸 특파원 장인환(張仁煥)을 만나 보도 정지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장인환을 매수하려 한 돈도 경찰의 것이 아니라 경찰이 피해자 최봉조 가족을 강요하여 마련한 것이었다. 두 번의 기사 보도 정치 요청을 받은 장인환이선장 기자가 작성한 관련 보도 내용을 자신이 직접 본사에 송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일보』 1931년 6월 14일에 「패검(佩劍)을 뽑아 피의자 자상(刺傷)」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었다.

이치가와 순사의 조선인 불법적 가해 사건이 보도되자 대구경찰서는 도리어 조선일보 대구지국의 장인환을 체포하여 조사한 뒤 검사국으로 넘겨 버렸다. 죄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지역에서는 일제 경찰이 수개월 전 술자리에 있었던 사소한 행동을 빌미로 장인환에게 복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인환 필화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대구경찰서의 조선인 언론인을 강압적으로 탄압한 사실이 알려지자 대구의 신문기자단은 대구경찰서의 와다나베[渡邊] 서장에게 ‘신문기자 부당 구속과 언론 압박’이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보내는 동시에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 대구경찰서를 방문하여 와다나베 서장을 만나 사건의 책임을 규명하는 동시에 장인환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하여 장인환이 당한 탄압 사건을 권력 남용에 의한 권익 침해 사건으로 규정하고, 대구경찰서의 잘못된 처사에 항의하고 올바른 사건의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경남기자동맹에서도 대구경찰서 서장에게 ‘타당치 않은 일로 사회의 공인을 함부로 구금하여 언론의 권위를 폭압한다’는 내용의 엄중한 경고문을 발송하여 일제 경찰의 부당한 언론 탄압에 항의하였다.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대구서원 폭행 사실 보도 사건」 또는 「순사 발검 기사 사건」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결과]

1926년 7월 장인환대구지방법원의 재판에서 변호인의 무죄 변론에도 불구하고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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