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314
한자 三八 西門市場 萬歲 示威
영어공식명칭 3·8 Protest for national independence at Seomun Marke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

[개설]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대구에서 일어난 첫 만세 시위로,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지역으로 만세 시위가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1910년 8월 일제의 한일합병조약 체결 이후 무단통치로 인한 폭압적 분위기와 경제 침탈 속에서 대구가 일본 우위의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전락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제기된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영향으로 발생하였다.

[경과]

대구에서는 1919년 2월부터 독립만세운동의 움직임이 꿈틀거렸다. 1919년 2월 16일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조카딸 김마리아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일본을 거쳐 대구로 와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 백남채(白南採)를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그 뒤 백남채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계성학교 교사 김영서(金永瑞)·김태식(金台植) 등을 만났다. 2월 24일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경상도의 연락을 책임진 이갑성(李甲成)이만집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였고, 2월 26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문진(金文珍)이 대구로 특파되었다. 3월 12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이 「독립선언서」 200매를 이만집에게 전달하였다. 이만집은 기독교 계통 인사들과 계성학교 교사들을 만나 만세운동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계성학교 교사들은 김삼도(金三道)·심문태(沈文泰)·정원조(鄭元祚)·박태현(朴泰鉉)·이승욱(李陞旭)·손석봉(孫石鳳)·최영학(崔永學)·김재범(金在範)·이영식(李永植)·이성용(李聖容)·박재곤(朴在坤) 등의 제자들에게 만세운동에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5일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崔相元)은 자신이 하숙하던 대남여관에서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이자 대남여관 주인의 아들인 허범(許範)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고, 허범은 다시 친구 신현욱(申鉉旭)을 비롯한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참 약속을 받아냈다. 최상원은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을 찾아가 신명여학교도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에게도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하였다.

평양의 숭실학교 학생 김무생(金武生)은 1910년 3월 7일에 경상북도 김천의 예수교 전도원으로 있던 박제원(朴齊元)과 함께 신명여학교 교사 임봉선(林鳳仙)을 만나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1919년 3월 3일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3월 8일 백남채가 예비 검속되었다. 이로써 만세운동을 추진하던 지도부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1919년 3월 6일 남성정교회 장로 김태련(金兌鍊)은 자신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시위운동에 쓰일 태극기를 만들고, 정원조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 보내 시위 일시와 장소가 3월 8일 오후 3시 큰장[현 서문시장]임을 확인시켰으며, 신명여학교와 성경학교에도 전달하였다. 1919년 3월 8일 만세운동에 앞서 대한독립만세 또는 태극기에 독립만세라고 쓰인 삐라가 도청 정문과 대구 곳곳에 붙여졌다.

1918년 3월 8일 오후 서문시장 주변에 만세운동 관련자들과 학생들을 포함한 800명가량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만집이 “지금은 조선 독립의 시기로서 각자가 독립을 희망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자연히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독립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연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드높이 삼창하였다. 이어 군중은 시위대를 형성하여 서문시장을 나섰고, 서문로에서 대구경찰서에 이르자 일제 경찰이 진압 태세를 갖추었다. 시위대는 경북도청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종로 방향으로 향하였고, 종로에서 다시 동성로로 행진하였다. 행진 중 대구경찰서 방면에서 제화노동자 강학봉(姜學奉)이 인솔하는 노동자 30여 명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결과]

만세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5~6대의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대구 주둔 일제 군경이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였다. 일제 경찰은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가자 157명을 구속하고, 그 가운데 67명을 재판에 넘겼다. 또한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등 대구 지역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의의와 평가]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 3·1운동의 시작을 알린 첫 만세 시위였고, 대구의 다섯 차례 만세 시위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또한 비밀결사 혜성단(慧星團)이 조직되고 활동하게 된 배경이 되었으며, 만세 시위를 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급시켰다. 그리고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종교인과 지식인, 학생과 여성, 노동자와 농민 등 다양한 신분과 계층이 참여한 전 민족적 항쟁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