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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대명동 만세 시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315
한자 四一五 大明洞 萬歲 示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5일연표보기 - 4·15 대명동 만세 시위
발생|시작 장소 대명동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지도보기
성격 만세 시위
관련 인물/단체 강윤옥|장용암

[정의]

1919년 4월 15일 대구 대명동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역사적 배경]

4·15 대명동 만세 시위는 1910년 8월 일제의 한일합병조약 체결 이후 무단통치로 인한 폭압적 분위기와 경제 침탈 속에서 대구가 일본 우위의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전락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제기된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영향으로 발생하였다. 대구에서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3월 10일과 3월 30일 동문시장 만세 시위로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었다.

[경과]

1919년 4월 15일 오후 5시경 달성군 수리면 대명동[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당시 대명동에 있던 공동묘지에 대구부 수정[현 중구 수동]에 살고 있던 최경삼(崔敬三)의 둘째 딸 제례(祭禮)가 있어서 약 5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이때 대명동에 거주하던 강윤옥(姜潤玉)장용암(張龍岩)이 공동묘지 북쪽 대구에서 현풍(玄風)으로 넘어가는 도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3~4회 소리 높여 외쳤다. 이들은 때마침 이곳 참례객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사법경찰관 오진태(吳鎭台)에게 들켜 강윤옥은 현장에서 검거되고 장용암은 달아났다가 뒤에 검거되었다.

[결과]

강윤옥장용암은 일제 경찰에 붙잡힌 뒤 대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1919년 5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8월과 징역 4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강윤옥은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4·15 대명동 만세 시위는 1919년 대구지역 3·1운동 중 네 번째 발생한 것으로, 만세시위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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