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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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雨栢 |
영어공식명칭 | Lee Woobaek |
이칭/별칭 | 백산(栢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언론인.
[개설]
이우백[1902~?]은 1902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였고, 이후 대구시보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호는 백산(栢山)이고, 부인은 이경분(李敬分)이다.
[활동 사항]
이우백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경주공립보통학교 부임하였고, 1923년 조선민보사(朝鮮民報社) 기자로 입사하였다. 1927년 매일신보사 경북지국 기자로 활동하였고, 1929년 7월 14일 대구극장에서 열린 대구신문협회(大邱新聞協會)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간부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봄부터 조선민보사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신문협회 부설 신문학원에서 신문학을 배웠다. 이후 중국 동북지방과 베이징(北京) 등지에서도 언론 활동을 펼쳤다.
이우백은 1938년 조선민보사로 돌아와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9년 4월 1일 대구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대구기우회(大邱記友會) 월례회와 임시총회에 참석하였다. 1942년 조선민보사와 대구일보사가 통합하여 대구일일신문사(大邱日日新聞社)가 되었고, 이우백은 1944년 무렵 대구일일신문사 대구총국 운영을 맡았다. 광복 후에는 윤홍렬(尹洪烈)과 함께 대구일일신문사를 인수하여 대구시보사(大邱時報社) 창간에 참여하였다. 1946년 10월 13일 대구시보사 공장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자 당시 대구시보 사장이던 이우백은 대구시민에게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9년 3월에는 대구공보사(大邱公報社) 사장으로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