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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557
한자 孫處訥[東區]
영어공식명칭 Son Cheonul
이칭/별칭 기도(幾道),모당(慕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동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3년 6월 25일 - 손처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손처눌 임진왜란 때 공산의진군 의병장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손처눌 이괄의 난 때 의병장으로 추대됨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손처눌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추대됨
몰년 시기/일시 1634년 6월 15일 - 손처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94년 - 손처눌 청호서원에 배향
출생지 손처눌 출생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학|강학지 손처눌 강학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학|강학지 손처눌 강학지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묘소|단소 손처눌 묘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성격 의병장
성별
본관 일직

[정의]

임진왜란 당시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활약한 공산의진군 의병장.

[가계]

손처눌의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고려 공민왕 때 좌리공신을 지낸 손홍량(孫洪亮)의 11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손세경(孫世經), 할아버지는 손치운(孫致雲), 아버지는 손수(孫遂),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이탄(李坦)의 딸이다. 첫번째 부인은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이원경(李遠慶)의 딸이며, 두번째 부인은 하성조씨(夏城曺氏)로 조응의(曺應義)의 딸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손첨(孫添),손잠(孫潛), 손침(孫沉)이다.

[활동 사항]

손처눌은 1553년(명종 8) 6월 25일에 대구부 수성리(壽城里)[지금 대구광역시 수성구]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소학』을 읽고, 13세 때 『대학』을 읽었다. 1566년(명종 21) 가을에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71년(선조 4)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7월 6일에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에 있는 부인사에서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태암(苔巖) 이주(李輈) 등 지역의 인사들과 향회를 열어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결성하였다. 이때 의병장 정사철(鄭師哲)서사원이 부모상을 당하자, 손처눌이 의병장과 소모사(召募事)를 겸직하였다. 손처눌은 의병을 이끌고 달성군[대구광역시 동구, 달성군, 수성구 일대], 동화사, 팔조령 등지에서 매복 기습 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 역시 연이은 부모상으로 의병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아우 오매정(五梅亭) 손처약(孫處約)에게 군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에게 군무칠조(軍務七條)를 올리면서 복병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597년 9월에 왜적이 다시 팔조령을 넘어 대구를 공격하자, 의병을 정돈하여 팔조령에 매복하여 왜적을 물리쳤고, 다시 달성으로 진격하여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당시 관찰사 한준겸(韓浚謙)이 손처눌의 공적을 조정에 아뢰어 포상하려 했지만, 손처눌은 사양하였다.

1599년(선조 32) 봄에 법이산(法伊山) 오야(梧野) 옛 터에 서실을 짓고 『근사록』을 강론하고, 9월에 서사원과 함께 『주자서절요』를 강론하였다. 1600년(선조 33) 2월에 황금동(黃金洞)[지금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부모 묘 아래 영모당(永慕堂)을 건립하고, 1602년(선조 35) 7월에 연경서원(硏經書院)의 당사(堂舍)와 재실을 설계하여 중수하고 강론할 장소로 삼았다. 1605년(선조 38) 3월에 한강 정구와 함께 선사재(仙査齋)에서 강학하고, 이듬해 1606년 3월에도 한강 정구와 함께 선사재에서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이후 낙재 서사원과 함께 지역의 유생을 모아 선사재와 연경서원에서 매달 강학을 열어 지역 문풍을 진작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72세의 고령임에도 향인들에 의해 의병장에 추대되었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1634년(인조 12) 6월 15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2세였다.

[학문과 저술]

손처눌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선조 33) 1월 8일부터 1629년(인조 7) 12월 26일까지, 약 30년 동안의 일상을 기록한 『모당일기』와 9권 3책의 『모당집』이 있다.

[묘소]

손처눌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손처눌(孫處訥)과 손조서(孫肇瑞)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94년(숙종 2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청호서원(靑湖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44년(헌종 10)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모당선생유허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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