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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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尙玩 |
이칭/별칭 | 신장균(申章均),전장춘(田章春)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철웅 |
[정의]
경기도 화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신상완(申尙玩)[1898~1951]은 1891년 5월 6일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용주사(龍珠寺)로 알려져 있다. 신장균(申章均)·전장춘(田章春) 등으로도 불렸다. 1917년 봄 용주사의 법계 시험에서 중덕(中德)으로 선발되었고, 불교계 최고 교육기관 중앙학림(中央學林)에 진학하여 학생대표, 유심회(維心會) 회장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한용운(韓龍雲)의 집에서 중앙학림 학생들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받았으며, 전국 사찰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확산하는 방안을 계획하였다. 3월 1일 당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불교학생들을 지휘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초순에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하여 유심회 회원 김상헌(金祥憲)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가, 독립운동 자금을 얻어 상하이에 불교도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4월 중순 국내로 귀국하였다. 이후 4월 하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국장 안창호(安昌浩)와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1919년 8월에는 강원도 지역에서 10월 3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을 기리는 제2차 독립운동시위를 실행하라는 임무를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강원도 특파원으로서 귀국하였다. 1919년 10월 철원 지역의 독립만세운동 시위에 기여한 신상완은 이후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봄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등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옥고를 치른 공적이 확인되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