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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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春成 |
이칭/별칭 | 가천춘일(嘉川春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혜린 |
[정의]
경기도 화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조춘성(趙春成)[1910~1968]은 1910년 3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안룡면 오목천리[1949년~1962년간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오목천리] 524번지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도기 제조 직공으로 강원도(江原道) 원주군(原州郡) 귀래면(貴來面) 운계리(雲溪里)로 이주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1944년 12월 하순 경성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이름 모를 사람에게 들은 것을 바탕으로 이웃에게 연합군 폭격기의 조선·일본 폭격설을 유포하였다. 1944년 12월 29일 운계리 121번지 금천상덕(金川相德)의 집에서 박태수(朴泰洙) 및 김귀봉(金貴鳳)에게 ‘B29기가 누차 조선에 날아와서 중요 광산이나 공장 등을 촬영하여 갔는데, 이는 장래 폭격을 위한 것이다.’ ‘적의 폭격이 심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있던 쇼와[昭和] 천황도 어딘가로 도망가있다’ 등을 이야기 하였다. 1945년 1월 1일에는 운계리 235번지 금해현복(金海現福)의 집에서 금해현복 부부와 김귀복, 장길환(張吉煥)에게 같은 내용을 유포하였다. 이에 전쟁 중 민심을 혼란시켰다는 이유로, 1945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불경, 안녕 질서에 대한 죄로 징역 8월 판결을 선고받았다. 1968년 9월 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일제의 전시체제(戰時體制)를 방해한 혐의로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되어 2009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