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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리 충절비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301
한자 北陽里 忠節碑-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0년 6월 20일 - 「육교동 지각 전설」 김찬모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1년 9월 30일 - 「효자 최루백」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채록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흥선대원군|노인

[정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에 살던 한 노인에게 흥선대원군이 충절비를 세워 주었다는 이야기.

[개설]

「북양리 충절비 이야기」에는 납치되어 압송되어 가던 흥선대원군의 행차를 막아선 남양 북양리 노인에게 내려줬다는 충절비가 등장한다. 그리고 노인이 흥선대원군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막아선 지점인 북양리의 느티나무 괴목도 등장한다. 그러나 북양리 최씨 노인의 신원 및 보호수라는 느티나무의 위치가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아 사실 유무 확인은 어렵다. 북양리 노인에 대한 충절비 및 흥선대원군 압송 행렬이 멈춰선 느티나무 괴목 위치 등 서사적 내용과 관계하는 문화적 증거물이 지역의 도시화 과정에서 이전되거나 사라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 추가적 지역 조사가 필요하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9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북양리 충절비(北陽里忠節碑)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518~519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북양리 충절비 이야기」는 1980년 6월 20일 송산면 사강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김찬모[남, 64세]이며 조사자는 성기열, 최명동, 김용범이다.

[내용]

마산포에 상륙한 청나라 군대가 한성에 진입해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뒤 다시 마산포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흥선대원군을 연행하는 청나라 군대의 행렬이 남양의 북양리를 지나는데 마을의 느티나무 괴목(槐木) 아래에 의관을 정제하고 서 있던 한 노인이 갑자기 길가로 나와 엎드렸다. 노인은 압송당한 흥선대원군의 행차를 몸으로 가로막으며 “우리 만 백성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 행차는 더 이상 못 간다!”라고 외쳤다. 청군이 욕을 하고 겁박을 주어도 조금의 두려움 없이 계속하여 행차를 저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한양에서부터 북양리까지 이동하는 동안 누구하나 막아서지 못하던 삼엄한 청나라 군대를 멈춘 충절과 기개에 놀라 노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였다. 대원군은 노인에게 막아선 연유를 물었다. 노인은 “백성을 두고 가버리시면 남은 백성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눈물을 흘리며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더 기가 막히나 그래도 후일을 기약하자.”고 했다. 후에 환국한 대원군이 북양리로 와서 그 최씨 노인을 찾았으나 이미 타계한 뒤였다. 대원군은 북양리 노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동지벼슬을 내려주고 충절비를 세워주었다.

[모티프 분석]

「북양리 충절비 이야기」는 화성 마산포에 상륙한 청나라 군대가 한양으로 가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뒤 다시 마산포를 통해 청나라로 돌아갔다는 역사적 사건과 관계한다. 이때 청 군대의 흥선대원군 납치 호송을 한양 도성에서부터 그 누구도 막아서지 못했는데, 남양읍 북양리의 한 노인이 단신으로 행차를 가로막았다는 내용에서 지역민의 특출난 기개와 충절이 강조된다. 더하여 흥선대원군이 남양 북양리 노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다시 해당 지역을 찾고, 벼슬과 충절비를 하사하였다는 내용에서 널리 공인 받은 지역의 특별한 충심에 대한 지역적 자긍심을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 성기열,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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