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4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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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完州宋英耉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for Song Yeong-gu, Wanju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산2-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유철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56년 - 송영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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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송영구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666년 - 완주 송영구 신도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5년 7월 17일 - 완주 송영구 신도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완주 송영구 신도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
현 소재지 | 완주 송영구 신도비 -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산2-1 |
성격 | 비 |
재질 | 대리석[비신]|화강암[이수·좌대] |
크기(높이,너비,두께) | 172㎝[높이]|78㎝[너비]|21㎝[두께]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에 있는 조선 중기 송영구의 신도비.
[개설]
완주 송영구 신도비는 좌대[기물을 받쳐서 얹어 놓는 대]와 이수[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가 잘 갖추어져 있고 조각 수법도 정교하고 뛰어나며, 특히 당대의 명필인 송준길의 서체로서 수작(秀作)으로 평가된다. 송영구[1556~1620]의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仁叟), 호는 표옹(瓢翁), 일표(一瓢), 백련거사(白蓮居士)라 했으며, 시호는 충숙이다. 세웅(世雄)의 증손자로, 할아버지는 억수(億壽)이고, 아버지는 영(翎)이다. 어머니는 사온서영(司醞署令) 하세준(河世濬)의 딸이다. 송영구는 29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처음으로 승문원에 배속되었고 승문원 주서(注書)·사과(司果)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관찰사의 종사관, 이후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가 되고 형조참의 병조참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이 되고 분병조참판(分兵曹參判)이 되었다. 1593년 5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주지번을 만나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주지번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수차 사신으로 조선에 왔으며 송영구를 늘 스승으로 섬겼다.
[건립 경위]
송영구는 1620년(광해군 12)에 65세로 별세했으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예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에 특증되었고 다음해에 왕이 예관을 그의 고향에 파견해서 제사했다. 주지번 역시 송영구를 기리며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현판도 써 주었다. 완주 송영구 신도비는 송영구가 타계한 지 46년 후인 1666년(현종 7)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위치]
완주군 봉동읍 소재지에서 금마 방향으로 익산 나들목 입구를 조금 못 가서 우측 GS주유소의 샛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호남고속도로의 암거[지하에 매설 혹은 복개를 해서 수면이 보이지 않도록 한 통수로]를 지나면 제촌지와 함께 제촌마을이 있는데 완주 송영구 신도비는 제촌마을의 진천송씨 선산의 하단부에 있다.
[형태]
완주 송영구 신도비는 이수, 비신[비석의 중심을 이루는 비문을 새긴 돌], 좌대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수(螭首)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며 방형의 좌대(坐臺)는 연화문 등 여러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위로 비신(碑身)이 세워져 있다. 잘 갖추어진 이수와 좌대는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뛰어나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으며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篆字)]은 증손자 송창이 썼다. 특히, 송준길이 쓴 이 비문은 해서에 행서를 가미한 능숙한 글씨로 양송체의 진수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두전은 소전의 자형을 갖추고 있으나 방형으로 각을 주어 써서 특색이 있다. 이수(螭首)는 높이 47㎝, 폭 91㎝, 두께 32㎝이고 비신(碑身)은 높이 172㎝, 폭 78㎝, 두께 21㎝이며, 좌대(坐臺)는 높이 60㎝, 폭 150㎝, 두께 74㎝ 내외이다.
[금석문]
비문에는 “경상도관찰사증예조판서송공신도비[전액] 유명조선국가선대부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증 자헌대부예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송공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 겸 령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전 이정구찬 정헌대부의정부좌참찬 겸 성균관제주 송준길 서 증손통훈대부전행사헌부장합창전(慶尙道觀察使贈禮曹判書宋公神道碑(篆額) 有名朝鮮國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贈 資憲大夫禮曹判書 兼 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宋公神道碑銘 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兼 領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傳 李廷龜撰 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 兼 成均館祭酒 宋浚吉 書 曾孫通訓大夫前行司憲府掌合昌篆) ... 공(公)은 가정병진(嘉靖丙辰)[1556, 명종 11]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재주가 준걸하고 빼어나서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다. 공은 생긴 용모가 빼어나 분명하고 생각과 이론이 바르고 논리가 정연한 데다가 성질 또한 담백하고 강직함을 겸하여 행동이 바르고 점잖은지라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엄하고 딱딱하게 여겼다. ... 전중공 흥시는 빗돌을 다듬어 글을 청하여서 미처 세우지 못하였고 군수공 유전은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기에 유경 등의 비를 세우는 공사를 잘 마무리 짓느라 연대가 많이 뒤로 밀려 늦춰지는 바람에 자손들 또한 번창하여 수가 불어났기에 더 보태어 기록하여 알리는 바이다. 숭정후 39년 병오 6월 일 세움[1666년, 현종 7]”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완주 송영구 신도비는 진천송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묘 앞에 세워진 신도비의 둘레는 최근에 화강암으로 난간석을 설치하고 바닥에 판석을 깔아 정비했다. 2015년 7월 17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