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639
한자 李繼孟
영어공식명칭 Lee Gye-maeng
이칭/별칭 희순(希醇),묵곡(墨谷),묵암(墨巖),문평(文平)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58년(세조 4)연표보기 - 이계맹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89년(성종 20) - 이계맹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98년(연산군 4) - 이계맹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03년(연산군 9) - 이계맹 장령(掌令)으로 복위 후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됨
활동 시기/일시 1506년(중종 원년) - 이계맹 대사헌(大司憲) 승진
활동 시기/일시 1507년(중종 2) - 이계맹 전라도 진도(珍島)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09년(중종 4) - 이계맹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10년(중종 5) - 이계맹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517년(중종 12) - 이계맹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감
몰년 시기/일시 1523년(중종 18)연표보기 - 이계맹 사망
출생지 이계맹 출생지 - 완주군
사당|배향지 이계맹 배향지 -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
성격 문관
성별 남자
본관 전의(全義)
대표 관직|경력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호조판서(戶曹判書)|형조판서(刑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좌찬성(左贊成)|병조판서겸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학자 겸 관료.

[가계]

이계맹(李繼孟)[1458~1523]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 또는 묵암(墨巖)이다. 태사(太師) 이도(李棹)의 후손이다. 부여감무(扶餘監務) 이의(李宜)의 증손자이며, 현감(縣監)을 지낸 이대정(李大種)의 손자요, 이영(李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생원(生員) 채소명(蔡紹明)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계맹은 1458년(세조 4) 전라도 완주에서 태어났으며, 1489년(성종 20) 32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설서(設書), 정언(正言), 집의(執義) 등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 김종직이 전라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전라도 유생을 모아 시험을 치른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이계맹이 붓과 종이를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이계맹의 성적이 뛰어나서 있었던 일이며, 김종직과 사제관계는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되어 곧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후 이계맹은 한동안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 열중했다. 1503년(연산군 9)에 이르러 장령(掌令)으로 정치에 복위한 후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507년(중종 2), 박경(朴耕)이 박원종(朴元宗) 등 공신을 죽이려 한다는 이른바 ‘박경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전라도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억울함이 밝혀져 해배(解配)된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부임했다. 이계맹은 1509년(중종 4)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되고 1510년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517년(중종 12)에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갔을 때는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내용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 이후 형조판서(戶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좌찬성(左贊成), 병조판서겸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 등을 역임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을 때 사류(士類)들에 대한 조정의 처리가 지나치자 이계맹은 이에 불만을 품고 관직을 떠나 전라도 김제(金堤)에 있는 농막으로 퇴거했다. 1523년(중종 18)에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이계맹의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