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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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應元 |
영어공식명칭 | Yu Eung-won |
이칭/별칭 | 극기(克己)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호석 |
거주|이주지 | 유응원 세거지 - 전라북도 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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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신 |
성별 | 남자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경력 | 석성현감(石城縣監)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세거했던 문신.
[가계]
유응원(柳應元)의 자는 극기(克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531년(중종 26)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에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낸 유세화(柳世華)의 손자이자 유회(柳會)의 아들이다. 유세화의 동생 유세무(柳世茂)도 1552년(명종 7)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활동 사항]
유응원은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했다. 그 뒤의 관력(官歷)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지만 몇몇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 유응원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미암집(眉巖集)』에 실려 있는 1570년(선조 3) 9월 28일자의 일기에는 유응원이 전직 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 미암 유희춘(柳希春)을 방문한 기록이 나온다. 정경운(鄭慶雲)이 전란 당시의 체험을 기록한 『고대일록(孤臺日錄)』에는 유응원이 1594년(선조 27) 12월에 정경운, 장응천(張應千) 등과 여산군(礪山郡)에서 유숙을 한 뒤에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송준길(宋浚吉)이 지은 구영(具瑩)의 행장에는 1614년(광해군 6) 광해조에서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유응원이 이에 찬동하는 통문을 지었고, 격분한 구영이 그 통문을 가져다가 불살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같은 내용이 『사계전서(沙溪全書)』의 거의록(擧義錄)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