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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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命龍 |
영어공식명칭 | Choi Myeong-ryong |
이칭/별칭 | 여윤(汝允),석계(石溪)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범호 |
출생 시기/일시 | 1567년(명종 22) - 최명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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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21년(광해군 13) - 최명룡 사망 |
출생지 | 최명룡 출생지 - 전라북도 전주시 석계촌 |
성격 | 예술가 |
성별 | 남자 |
본관 | 전주(全州)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활동한 학자이자 문인화가.
[개설]
최명룡(崔命龍)[1567~1621]은 조선 중기의 한학자로 어려서부터 비범해서 12세에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집례를 어른처럼 의젓하게 하므로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이정기의 문하에 있을 때 이정기가 말하기를 “최씨의 자제가 나를 가르치러 왔다”고 하며 탄복했다고 한다. 그 후 신중경의 문하에서 수업한 뒤 변산의 절에 들어가 10년 동안 사자(四子)와 염락제가(廉洛諸家)를 비롯해 음양(陰陽), 천문(天文), 지리(地理), 방기(方技), 도교(道敎), 불교, 산학(算學) 등을 연구해서 정통했다. 인품이 크고 문장이 유려해 당대의 선비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을 호종(扈從)하기도 했다. 김장생(金長生)이 익산군수로 부임하자 최명룡은 김장생의 문하에 나가 사사했는데 김장생이 “나는 모래 같고 너는 돌 같다”고 하였고, 최명룡이 죽자 김장생이 제문에서 “내가 그대의 스승이 아니라 그대가 나의 스승이었다”고 애도했다. 죽은 뒤에 대사헌(大司憲)을 추증했다.
[가계]
최명룡의 자는 여윤(汝允)이며, 호는 석계(石溪)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전주 석계촌(石溪村) 출생으로 중랑장공(中郞將公) 최용봉(崔龍鳳)의 8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최순성(崔順成)이고, 아버지는 단성현감(丹城縣監) 최위(崔渭)이다.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로 현감(縣監) 이경우(李景佑)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명룡은 이우기(李迂棋)와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변산사(邊山寺)에 들어가 10년을 작정하고 학문에 열중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김준업(金峻業)·김동준(金東準)과 함께 삼현(三賢)이라 불렸으며, 역학·음양학·수학·불교학 등에도 능통했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전문적인 화가를 능가했다고 하며, 김장생의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조평(趙平)과 교유했으며, 문인으로는 권극중(權克中)·유집(柳楫) 등이 있다.
[학문과 저술]
최명룡의 그림으로는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전하는데, 당시 유행하던 절파화풍으로 그린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畫風)이다.
[상훈과 추모]
최명룡은 전주의 화산서원(華山書院)과 부안(扶安)의 옹정사(瓮正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