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로와 삼례역 -옛길, 삼례집회와 9월봉기, 동학농민군의 최후 저항지 대둔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360
한자 朝鮮時代驛路-參禮驛
영어공식명칭 Yeokro and Samryeyeok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 an old road, Samrye Rally and Uprising of September, Resistance Site of Donghak Peasant Army, Daedunsan Mounta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하태규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의 조선시대 역로와 삼례역.

[도입] 삼례역의 지리적 위치와 위상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에 위치하였던 삼례역은 고려 전기로부터 조선 말기까지 운영되었던 역참이었다. 삼례는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북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전라도에서 지리적으로 교통의 요지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전라도의 수부인 전부의 북쪽 관문의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삼례역은 중앙과 전라도를 연결하는 길목에 있는 수역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삼례역은 그 규모가 크고 그 기능 또한 다른 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러한 삼례역의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삼례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도 전개되었으나, 삼례역참은 근대의 새로운 교통 통신 기관이 등장함으로써 폐지되었다.

[전개 1] 역로제의 실시와 삼례 역참의 설치

우리나라에 역원제도가 도입된 것은 이미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각국의 수도로부터 지방으로 연결되는 도로망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역참을 두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신라시대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전국에 연결되는 도로망이 정비되었다.

이러한 도로망은 고려시대에 더욱 확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전국의 도로는 개경으로부터 전국 각지로 연결된 간선이 있었고, 다시 간선에서 뻗어 나간 지선을 이루어 지방 각 관읍(官邑)에 연결되었는데, 그 중요도에 따라 대로·중로·소로의 3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도로상에는 관리들의 통행과 숙박을 비롯하여 명령의 전달 등 통치를 목적으로 역이나, 원 등의 교통 숙박 시설을 많이 설치했다. 특히 각지에 설치한 역은 그 규모에 따라 대, 중, 소의 구분이 있었다. 그에 따라 역의 운영을 위한 역장 등 인원 배치 및 공수시지의 지급에서 차등을 두었다.

고려시대 전국에 525개 정도의 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역들은 22개의 역도로 편성되어 역도제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역도제 하에서 삼례역은 전공주도에 속하였는데. 전공주도는 현재의 충청남도 남부와 전라북도 북부 및 서부 지역에 있는 21개의 역을 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수도였던 한양으로부터 영남대로·의주대로·산남대로·관동대로 등의 간선도로가 전국을 사방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전라도 지역에도 서울은 물론 고을과 고을을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조선 후기의 자료를 검토해보면, 신경준의 『도로고』에는 6대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10대로, 『신증문헌비고』에는 9대로의 전국 간선 도로망을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전국의 도로를 중요도에 따라 대로·중로·소로로 나누고, 도로 폭은 대로 12보, 중로9보, 소로6보로 정했다. 그러나 자세한 사항은 지방마다 지형 여건에 따라 다소 다를 수도 있었다.

도로에는 일정한 거리마다 이정표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도로의 거리는 주척 6척을 1보, 360보를 1리, 30리를 1식이라 하였고, 10리마다 소후(小堠),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세우고 거리와 지명을 표시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돌무지를 쌓고 장승을 세워 사방으로 통하는 길의 거리와 지명을 기록했고, 주요 도로에는 얇은 돌판을 깔거나 작은 돌, 모래, 황토 등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도로변에는 대략 30리마다 관리들을 위해 역을 설치하고 그 중간에 원 등의 숙박 시설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전국의 가로망과 역원은 성종 대의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전국의 500여 개의 역이 41개의 역도로 편성되었으며, 이러한 역도제도는 대부분 커다란 변동이 없이 구한말까지 존속되었다. 조선시대 전라도에는 총 59개 역이 삼례도, 오수도, 창임도, 경양도, 벽사도, 제원도 등 6개의 역도로 편성되었는데. 삼례역은 삼례도에 속한 삼례[전주]·반석[전주]·오원[임실]·갈담[임실]·소안[임피]·촌곡[함열]·양재[여산]·앵곡[전주]·거산[태인]·천원[정읍]·영원[고부]·부흥[부안]·내재[김제] 등 13개 역의 수역이었다.

각 역도에는 찰방과 역승을 두어 업무를 총괄했다. 역의 주요 기능으로 국가명령이나 공문서의 전달, 내외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관수 물자의 수송, 내외인의 왕래 규찰 및 죄인 체포·압송, 유사시 국토방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대개 역에는 찰방·역승의 감독 아래 역장·역리·역노비 등을 배치하였다. 이처럼 역에 소속되어 역무를 담당한 사람들을 역민(驛民) 또는 역속(驛屬)이라 한다.

찰방·역승은 역도의 크기에 따라 종6품 또는 종9품의 문관으로서 역도에 1명씩 배정되었으며, 역장은 각 역의 역리 중에서 2~3명을 뽑았으며, 역리는 역의 대소에 따라 그 정원이 정해졌으나 실질적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역노비는 역의 대소에 따라 상등역에 50명, 중등역에 40명, 하등역에 30명씩 배정되었다. 이러한 역민은 고역으로 인하여 도망하는 사례가 많아 역 부근의 보충군(補充軍)이나 정군(正軍)·향호(鄕戶) 또는 일반 백성들을 차출하여 역민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역에서는 주요 운송수단인 역마의 확보를 중요시하였다. 역마는 용도에 따라 승마용 기마(騎馬)와 운반용 태마(駄馬) 또는 복마(卜馬)로 구분되고 크기에 따라 대·중·소 또는 상등·중등·하등으로 구별하여 지급되었다. 각 역에서는 정해진 수의 말을 확보하여 관리의 왕래에 제공해야 했다. 관리가 역마를 이용할 때에는 상서원에서 발급한 마패를 제시하면 『경국대전』 급마 규정에 따라 역마를 지급했다.

조선시대 삼례역에는 찰방 1인을 두었는데 문관 종6품이었다. 그 아래에 역리 596명, 노 191명, 비 51명, 일수 31명, 말 15필이 속해 있었다. 삼례역도에는 본 역 외에도 반석역과 앵곡역 등 전라도 지역의 12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 각 역에도 역리를 비롯하여 많은 노비, 일수 등이 속해 있었다.

[전개 2] 고려 현종의 나주 피난과 삼례역

역사적으로 볼 때 삼례역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고려 현종 2년(1011) 제2차 거란 침략 때의 일이었다. 목종 말년 강조의 정변으로 현종이 즉위하자, 이를 구실로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앞서 성종 12년(993) 고려를 쳐들어왔던 거란은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이후 고려는 거란의 묵인하에 ‘강동 6주’를 개척하고, 나아가 거란에 대한 견제하는 태도를 보이자, 다시 고려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마침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현종을 옹립하자 이를 구실로 고려를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고려를 침공한 거란은 강동 6주에서 저항에 부딪히자 우회하여 개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현종은 거란의 침략을 피하여 나주로 가기 위해 남행하여 삼례역에 이르렀다. 이때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미복으로 삼례역에 나아가 왕을 맞이하려 하였다, 이때 박섬이 왕의 측근에 있다가 ‘전주는 백제의 옛 땅으로 성조께서도 미워했으니 가지 말라’는 조언을 듣고 전주로 들어가지 않고 장곡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조용겸이 무력으로 왕을 모셔가려고 소동을 벌이다가 지채문 등의 활동으로 저지되었다. 현종은 나주로 내려갔다가 거란군이 퇴각하자 귀경길에 전주에 들렀다가 공주를 거쳐 개성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전개 3] 임란의병의 삼례창의

조선시대 삼례역은 삼례도의 수역으로 전라감영이 위치한 전주부 북쪽의 첫 번째 역이었기 때문에 그 위상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지역 주민들의 집결지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례의 하나가 임진왜란기 전주, 고부, 익산 등지의 선비들이 모여 의병 창의를 한 곳이 삼례역이었다. 임진왜란기 의병 활동의 주도세력은 지방의 지배세력이며 사회적으로 특권세력인 지방 사족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에서는 여러 선비가 창의 활동을 전개하여 나주의 김천일이 가장 먼저 군사 3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로 북상하였고, 이어서 광주의 고경명이 담양에서 양대박, 유팽로 등과 함께 호남 의병을 결성하여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근왕을 목표로 북상하여 전주를 거쳐 은진으로 올라갔다가 왜군이 금산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산으로 이동한 뒤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의병진이 무너지고 고경명 등이 전사하였다.

김천일, 고경명이 창의 활동을 전개할 때, 고부에 살던 전 순창군수 김제민이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5월 중순쯤 전주 주변의 전라도 군현에는 5월 27일을 기일로 삼례 역전에 모이도록 촉구하는 김현, 김흔, 김섬 등 고부 유생들이 격문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김현, 김흔, 김섬은 일재 이항의 문인인 김제민의 아들들이었다. 『쇄미록』에 의하면 5월 27일 고부의 열사들이 글을 만들어 여러 고을에 알리고 한도의 의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기 위하여 삼례에 모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에 호남의 여러 인사들이 격문에 응해 삼례역에 모여서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호남절의록』에서는 김제민을 호남 삼창의의 하나로 꼽고, 그를 ‘삼운장’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김제민은 그는 아들인 김엽, 김흔, 김안과 의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행재소로 달려가기 위해 고산으로 갔다가 적이 금산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웅치전에 참전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아들 김안이 전사한다. 삼례에서 회맹한 초기 의병은 주로 왜군의 호남 공격에 대한 방어 과정에서 주로 웅치이치 등지에서 전투에 참전하고 활동이 일단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의병 활동을 주도한 김제민은 후일 장성 남문 창의에 참여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된다.

[전개 4] 동학농민혁명과 삼례 봉기

조선 말기 삼례역에서는 동학 교세가 확대되자 동학교인들의 교조신원운동을 위한 동학교도의 대규모 집회가 이루어졌던 곳이며, 나아가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이 집결한 제2차 봉기를 일으킨 곳이다.

1864년 동학을 사교(邪敎)로 단정한 조선 정부에 의해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사형을 당한 이후, 동학은 탄압을 피하면서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20년 뒤에는 그 세력이 상당히 뻗어 나가,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동학의 본거지를 충청북도 보은군으로 옮겨 적극적으로 교권 재건 운동을 폈다. 그러나 부임한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동학도에 대한 탄압과 사찰을 강화하고, 관리들의 발호가 심해져 교도들의 신변이 위태로워졌다.

1892년 7월 최시형의 제자인 서병학(徐丙鶴)은 남접파(南接派)인 서장옥(徐長玉)과 함께 최시형에게 신원운동을 벌일 것을 역설하였으나, 최시형은 은인자중할 것을 지시하였다. 마침내 최시형의 승낙을 받아낸 서병학·서장옥 등은 그해 10월 교도들을 공주에 모이게 하고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신원(伸寃)과 금폭(禁暴)을 요청하는 소장(訴狀)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한 조병식의 답변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뒀다고 생각한 그는 전국 교도들을 격려하는 입의문(立義文)을 보내고, 1892년 10월 1일을 기하여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날 삼례역 앞에는 수천 명의 동학도가 집결하여, 손천민(孫天民)을 소두(疏頭)로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李耕稙)에게 글을 보내어 교조 신원, 동학을 서학(西學)과 혼동하지 말 것, 교도에 대해 탄압 금지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양도의 관찰사는 교주의 신원 문제는 중앙정부의 소관이라 스스로 처리할 수 없고, 대신 관리들의 침학토색은 바로잡겠다고 약속하여 집회는 막을 내렸다. 이에 동학교도들 가운데는 해산하기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서울에 올라가 복합상소 운동(伏閤上疏運動)을 벌이기로 결의한 뒤에 해산하였다. 그리하여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 앞에서 동학 대표 40여 명이 복합상소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금구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처럼 동학이 삼례집회를 계기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을 때, 1894년 정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탄압을 계기로 고부 지방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다시 안핵사(按覈使)[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처리를 위해 파견한 임시 직책]로 파견되었던 장흥부사 이용태의 횡포를 계기고 3월 제목구민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전투, 황룡촌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김문현은 파직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이 전라도로 내려왔으나 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삼례역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민씨정권이 요청한 청군이 진주하는 것을 계기로 일본군이 진주하자 김학진과 전봉준이 화약을 맺고 동학군이 전주부성에서 철수하고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철군을 거부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경복궁에 난입하여 친일정권을 수립한 뒤 동학군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동학 지도자들은 척왜양이의 기치를 내세우고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하게 되었다. 9월 전봉준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고, 호남·호서의 남접 및 북접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전봉준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을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이후 수차례의 전투에서 우세한 무기와 조직력을 갖춘 일본과 관군에 의하여 패배를 당하여 무너지고 동학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말]

조선 말기까지 교통통신 기관으로서 역할을 해오던 삼례역은 근대에 들어서 새로운 통신 시설과 교통 기관이 도입되면서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882년 우정총국이 설치되고, 전신선이 가설되면서 그동안 각 지역의 역이 수행하던 통신 업무는 끝나게 되었으며, 자동차와 기차가 도입되어 신작로와 철도가 개설됨으로써 교통시설로서의 역참의 기능도 소멸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삼례역참은 폐지되고, 대신 그 기능은 우체국이나 철도역이 담당하게 되었다.

삼례에는 1914년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부설되면서 보통역으로 새로운 삼례역이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이 노선은 1927년 광궤(廣軌)[표준궤보다 폭이 넓은 궤간을 가진 철도 선로]의 경전북부선으로 개편되었고, 전주에서 순천까지 단계적으로 연결되어 1936년 전라선 철도가 완성되었다. 이에 따라 삼례역은 최근까지 지역 주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동차의 보급이 일반화되면서 삼례 철도역의 기능 또한 점차 약화하였다.

삼례역참이 폐지된 뒤에도 삼례역참의 관아시설이나 마방 등의 건물들은 한동안 유지되면서 삼례 지역 주민들의 삶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로가 확장되고, 근대적 건물이 들어서면서 옛 삼례역참의 시설은 하나둘 사라지고 현재는 남아 있는 것은 없다. 현재 삼례 동부교회가 있는 일대가 삼례역참 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완주도서관 앞마당에는 관찰사를 비롯한 삼례찰방 등의 선정비들이 모여 있어 그 옛날의 삼례역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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