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혁신도시, 첨단과학단지였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363
한자 全北革新都市, 尖端科學團地-
영어공식명칭 Jeonbok Innovation City, It was a Science Park
분야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선사/철기
집필자 곽장근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과 전주시에 있는 초기철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전북 동철서염(東鐵西鹽)의 큰 무대]

인류의 역사 발전에서 공헌도가 가장 높은 것 중의 하나가 철과 소금이다. 한나라 무제가 제정해서 시행한 소금과 철의 전매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염철론’으로 전라북도는 ‘염철론’의 큰 무대였다. 전라북도 서부지역에서 소금이, 동부지역에서 철이 생산되었는데, 여기에 근거를 두고 전라북도를 ‘동철서염(東鐵西鹽)’으로 표명하기도 한다. 선사시대부터 줄곧 전라북도에서 생산된 소금과 철이 전라북도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세력집단이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제나라 전횡의 망명과 고조선 준왕의 남래]

기원전 202년 제나라 전횡이 어청도로 망명해 왔는데, 전횡을 모신 사당 치동묘(淄東廟)[제나라 도읍 임치 동쪽에 있는 사당]가 전라북도 군산시 어청도에 있다. 충청남도 보령시 외연도에도 전횡 장군 사당이 있는데, 해마다 음력 2월 14일 외연도 당제에서 풍어의 신으로 전횡을 제사하고 있다. 외연도 동쪽 녹도에도 전횡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사당의 주신으로 전횡 대감을 모신다. 그리고 새만금 방조제가 시작되는 비응도에도 전횡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전횡이 쓴 것으로 전하는 칼이 사당에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초기철기시대 때 소금 생산 등 해양왕국으로 유명한 제나라 전횡의 망명은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1975년 전북혁신도시 내인 전라북도 완주군 상림리에서 나온 26점의 중국식 도씨검이 교역보다 망명객에 의해 유입된 것으로 본 주장이 있다. 반면 중국식 동검과 달리 검신이나 병부의 단면이 편평하고 무게도 차이를 보여 중국에서의 수입품보다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식 청동검은 제나라 전횡이 군산 어청도·비응도를 거쳐 전북혁신도시에 정착했음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물이다. 제나라 전횡이 망명하고 8년 뒤 또 한 사람의 왕이 군산으로 왔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새로운 땅을 찾았는데, 당시 준왕이 상륙한 곳이 금강 하구 나리포라고 한다. 이 포구의 공주산을 중심으로 어래산성과 도청산성, 관원산성에 준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풍부하다.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준왕은 산을 넘어 전라북도 익산시에 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당시 준왕의 딸 공주가 머물렀던 산을 공주산이라고 불렀고, 준왕이 공주를 데리러 왔다고 해서 공주산 앞쪽 산을 어래산(御來山)이라고 부른다. 금강 하구 나리포로 내려온 준왕은 전라북도 익산시 일대에 최고의 청동기문화를 남겼다. 그렇다면 만경강을 중심으로 전횡이 전북혁신도시에, 준왕이 전라북도 익산시 일대에 정착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새만금 일대 패총 및 말무덤의 왕국]

일본에서 농경의 신과 학문의 신, 의학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 제나라 방사 서복이다.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새만금, 제주도를 거쳐 일본에 정착했다. 진나라 서복의 불로초 탐사, 제나라 전횡의 망명, 고조선 멸망 이후 준왕의 남래로 당시에 최고의 선진문물이 바닷길을 통해 곧장 만경강 유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유추된다. 이 무렵 전북혁신도시가 초기철기시대 테크노밸리로 급성장하면서 급기야 만경강 유역이 새로운 초기철기문화의 거점 지역으로 급부상한다. 만경강 유역이 당시 테크노밸리로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나라 전횡의 망명과 고조선 준왕의 남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만경강 유역에서 거친무늬거울이 잔무늬거울로 바뀌었고, 전북혁신도시에서 만든 잔무늬거울이 전국에 널리 유통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의 전래와 바닷길의 발달로 순식간에 패총의 규모가 커졌다. 고고학에서는 패총을 해양활동의 백미로 평가하는데, 학계에 보고된 600여 개소의 패총 중 200여 개소가 새만금 일대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군산 개사동 패총은 그 규모가 100m 이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일찍부터 거미줄처럼 잘 갖춰진 교역네트워크와 소금 생산을 기반으로 새만금의 해양문화가 융성했던 해양경제의 메카였음이 입증된 것이다. 마한의 거점세력은 해양세력으로 알려졌는데, 우리나라에서 마한의 패총과 말 무덤이 가장 많은 곳이 새만금이다. 말 무덤은 말이 마(馬)의 뜻으로 보고, 말은 머리 혹은 크다의 뜻으로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관형사로 파악해 그 피장자는 마한의 지배층으로 밝혀졌다. 흔히 말사슴을 왕사슴, 말매미를 왕매미, 말벌을 왕벌로 부르는 것과 똑같다. 한마디로 말 무덤은 마한의 왕 무덤이다. 새만금의 해양문화가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나라 전횡의 망명과 고조선 준왕의 남래가 큰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된다.

[초기철시시대 전북혁신도시 유적과 유물]

2002년 전라북도 완주군 갈동유적을 시작으로 2011년 12월 황방산 북쪽 기슭 하단부에 있는 만성동에서 최고급 청동유물이 출토되었다. 2011년 12월경 동과가 발견 매장문화재로 신고되어, 그해 전주문화유산연구원 주관으로 시행된 수습조사에서 세문경·세형동검·동사 등 청동유물과 4점의 관옥이 출토되었다. 황방산과 인접한 전북혁신도시 내 구제발굴에서 초기철기시대 토광묘가 조사된 분묘유적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전라북도 완주군 갈동유적은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2003년, 2006년 두 차례의 구제발굴에서 초기철기시대 17기의 토광묘가 조사되었다. 토광묘는 구릉지 남쪽 기슭에 군집을 이루거나 단독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토광묘 안에서는 세형동검의 용범 1조를 비롯해서 청동칼, 청동거울, 청동화살촉, 청동창, 철낫, 철도끼, 옥, 점토대토기, 흑도장경호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세형동검의 용범을 비롯해 다양한 청동유물이 출토되어, 이 일대가 청동기 제작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해 주었다. 이 유적은 기원전 2세기 전후에 조성된 분묘유적으로 우리나라 초기철기시대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값진 고고학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전북혁신도시 내 원장동유적은 완주 갈동유적에서 남쪽으로 6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모두 5기의 초기철기시대 토광묘가 해발 40m 구릉지 남서쪽 기슭에서 조사되었으며, 묘광은 길이 217~262㎝, 너비 79~115㎝이다. 유물은 1호에서 세형동검 5점과 세문경 2점을 비롯해 동과·동부·동서·검파두식 3점·관옥 17점·환옥 3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2호에서 세형동검과 흑도장경호, 3호에서 동검과 검파두식·흑도장경호·석촉, 16호에서 동검과 동사·흑도장경호가 나왔다. 특히 구릉지 정상부에 입지를 둔 1호 토광묘는 만경강 유역에서 부장유물이 가장 풍부하게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완주 덕동에서 남서쪽으로 400m 떨어진 곳에 덕동유적이 있다. 2002년 지표조사에서 동착 용범편이 수습되어 주목을 받았으며, D 구역에서 3기와 F 구역에서 2기, G 구역에서 2기 등 모두 7기의 토광묘가 조사되었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165~264㎝, 너비 61~105㎝ 내외로 유구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유물은 D-1호에서 세문경편과 동검편·동사편을 비롯해 점토대토기와 흑도소호·석촉, D-2호에서 동부와 동사편·동착편·대부호 등이 출토되었다. D-3호와 F-1호는 토기류만 부장되었고, F-2호에서 동과와 검파두식이 나왔다. 그리고 G-1호에서 동검·동부·흑도장경호, G-2호에서 동검편과 조문경편이 출토되었다. 전북혁신도시 내 초기철기시대 분묘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조문경이 출토되어 그 조성 시기가 가장 올라간다.

전북혁신도시 내 초기철기시대 분묘유적 중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신풍유적이다. 모악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자락 말단부로 해발 35m 내외의 구릉지에 자리한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 초기철기시대 분묘유적으로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 유적은 ‘가’지구와 ‘나’지구로 구분되며, ‘가’지구에서 57기, ‘나’지구에서 23기 모두 80기의 초기철기시대 토광묘가 확인되었다. 토광묘는 구릉지의 남서쪽 경사면과 일치하게 장축 방향을 두었다. ‘가’지구는 10여 기의 토광묘가 5개의 구역에 조성되어 있는데, 묘광의 규모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커지고 철기유물의 양도 많아져 얼마간 시기적인 차이를 두고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묘광은 그 평면 형태가 장방형 혹은 장타원형으로 길이 112~383㎝로 매우 다양하다. 내부구조는 아무런 시설 없이 시신을 안치한 순수토광묘의 빈도수가 높고 늦은 단계로 가면서 목관묘의 사용이 증가한다. 특히 54호 토광묘는 길이 383㎝로 만경강 유역에서 조사된 토광묘 중 가장 대형이며, 유물은 토기류와 동사·철부·철도자 외에 간두령 1쌍이 나왔다. 우리나라의 10여 곳에서 간두령이 출토된 사례가 있는데, 전라북도 완주군의 신풍 54호 토광묘는 그 출토 위치가 파악된 유일한 유구로 학술 가치가 높다. 간두령은 절개구와 문양을 근거로 기하학 문양이 표현된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나 전(傳) 충청남도 논산시 출토품보다 늦고 전(傳) 덕산 출토품과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죽동리 출토품의 중간단계인 기원전 1세기 전반으로 정해졌다.

유물은 토기류와 청동기류·철기류·유리장신구류가 더 있다. 토기류는 원형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송국리형토기·발형토기·원통형토기·대부잔도 포함되어 있다. 청동기류는 세형동검과 세문경·동과·동부·동사 등이 있다. 동경은 피장자의 머리·가슴·허리·발치 등 다양한 곳에 부장되었으며, 깨뜨린 뒤 피장자 머리 옆이나 피장자 상면에 흩뿌리거나 세우거나 혹은 눕힌 상태로 부장되었다. 철기류는 철부와 철착·환두소도·철도자·철촉 등이 있으며, 유물의 종류는 주조품이 주종을 이루고 일부 단조품도 포함되어 있다. 유리 목걸이를 중심으로 환형 유리 등 다양한 유리 제작이 입증되었다. 이 유적은 기원전 3세기 후엽에서 기원전 1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외에도 전주시 중인동 5호 토광묘와 중화산동 2호 토광묘에서 세형동검편을 비롯해 중인동 하봉유적 1호 토광묘에서 동부가 출토되었다. 황방산 북서쪽 전북혁신도시 내 초기철기시대 분묘유적에서 17점의 청동거울이 나왔는데, 우리나라에서 그 출토량이 가장 많다. 전라북도 전주시와 전라북도 익산시, 전라북도 완주군 등 만경강 유역이 당시 테크노밸리로 급성장한 것은 전라북도 군산시를 중심으로 선사시대 이래로 구축된 해상교통로와 관련이 깊다. 서해의 연안항로와 만경강의 내륙수로가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져 이 루트를 통해 새로운 철기문화가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청동기시대 후기를 지나면서 새로운 철기 제조기술이 유입되는 과정에 만경강 유역이 서북한 지역과의 긴밀한 관련성이 증명되었다.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로 청동기시대 지석묘 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면서 새로운 질서의 재편과정은 마한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전북혁신도시 초기철기시대 첨단과학단지]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 연나라와 고조선의 무력 충돌로 고조선 유이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고조선 멸망 이후 준왕의 남천으로 만경강 유역이 새로운 거점 지역으로 급부상한다. 종래에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다송리,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신동리,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용순리의 오금산,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평장리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여의동, 전라북도 완주군 갈동에서 청동유물이 출토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렇듯 초기철기시대의 분묘유적이 전라북도 익산시와 전라북도 완주군, 전라북도 전주시 등 만경강 유역에서 대규모로 등장한다. 초기철기시대 때 전라북도 지역으로 새로운 철기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에 만경강 유역이 서북한 지역과의 긴밀한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본 견해가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종래에 큰 지지를 받았던 육로(陸路)보다 바닷길로 철기문화가 전라북도 지역으로 곧바로 전래했을 개연성을 방증해 주었다. 이 무렵 전북혁신도시만경강 유역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선진세력에 의해 ‘동철서염(東鐵西鹽)’의 생산과 유통체계가 굳건하게 구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에 따르면, 고조선의 준왕이 중국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한지(韓地)로 가서 ‘한왕(韓王)’을 칭했다고 전한다. 준왕이 남천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원전 194년~180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준왕이 남천해 ‘한왕’을 칭한 지역은 만경강을 중심으로 한 전북혁신도시 일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신풍유적은 해양문화와 내륙수로를 기반으로 발전한 초기철기시대 한반도 최대 규모의 유적으로 준왕의 남천과 마한의 성립 등 역사적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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