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483
한자 堤內里三忠閣
영어공식명칭 Samchunggak House(Place for Three loyalist) in Jenae-ri
분야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산117-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76년연표보기 - 제내리 삼충각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26년 - 제내리 삼충각 중창
현 소재지 제내리 삼충각 -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산 117-1 지도보기
성격 정려각
양식 팔작지붕|겹처마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조양임씨
관리자 조양임씨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려각.

[개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임정언(林廷彦)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임국주(林國柱), 임광후(林光后) 등 임씨 삼충(三忠)을 기리는 정문(旌門)이다. 임정언의 본관은 조양(兆陽)이며, 자는 사미(士美), 호는 한정당(閒田堂)이다. 참판 임각(林恪)의 후손이며, 고조할아버지는 상주목사 임중형(林仲亨), 증조할아버지는 진사 임을지(林乙枝), 할아버지는 진사 임숭백(林崇栢), 아버지는 진시 임핍(林愊)이다. 임정언은 풍채가 순수하고 위인이 중후했다. 임정언은 1589년(선조 22)에 북관으로 이사해 임진왜란을 당하자 정문부(鄭文孚)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영변에서 전공을 세웠다. 정문부가 나라에 아뢰어 북부 참봉을 제수받았다.

임국주의 본관은 조양, 호는 갈곡(葛谷)이다. 호조참의(戶曹參議) 임각(任恪)의 후손이며, 증조는 진사 임핍(林愊), 할아버지는 참봉(參奉) 임정언(林廷彦), 아버지는 임효갑(林孝甲)이다. 임국주는 재주가 있고, 행실이 두터웠으며 문장을 잘해 1618년(광해군 10)에 실시된 무오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봉사에 제수되었다. 임국주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창의(昌義)해 전장(戰場)으로 달려갔으나 난(亂)이 이미 평정(平靜)되어 돌아왔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자 애통해했다. 임국주는 인조가 근왕병을 모집하는 교서를 내리자, 분기하여 군량을 모았다. 이어 이흥발(李興渤) 등의 격문에 응해 도내의 여러 의사와 여산에 모였다가, 청주로 진격했다. 청주의 광교산에서 적과 접전해 다수를 참획하고, 계속 북상했으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와 모은 군량을 나라에 헌납했다. 그 뒤 임국주는 세상을 등진 채 여생을 마쳤다. 고종조에 정려가 내려왔다.

임광후[1585~?]의 본관은 조양, 자는 시평(時平)이다. 좌의정 임인무(林仁茂)의 후손이며, 상주목사 임중형(林仲亨)의 6세손, 임정언(林廷彦)의 종손이다. 임광후는 심지가 명민했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임광후는 재종제 임국주와 함께 의병을 모으고, 군량미를 확보해 여산에 이르렀으나 난이 평정되자 군량을 나라에 헌납하고 의병들을 해산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재종제 임국주와 함께 이흥발(李興渤) 등의 격문에 응해 도내 다른 의병들과 함께 여산에서 합세, 청주로 진격해 적과 접전 끝에 많은 적병을 참획(斬獲)하고 과천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종신토록 두문불출했다. 고종조에 정려가 내려왔다.

[위치]

봉동-금마 방향으로 799번 지방도를 타고 오른쪽에 봉동읍 봉동로 774 현대주유소가 있으며, 주유소 끝에 제내리 버스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는 봉동로 길 입구 좌측에 제내리 삼충각이 있다.

[변천]

1876년(고종 13)에 충신들을 기리기 위한 제내리 삼충각을 건립했으며, 현재 걸려 있는 상량문에는 1926년에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어,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제내리 삼충각은 팔작지붕[사다리꼴의 맞배지붕에 측면에 지붕을 달아낸 형태]에 겹처마 형식이다. 제내리 삼충각은 정면 1칸[225㎝], 측면 1칸[215㎝]으로 되어 있다. 정면 처마 아래에는 ‘삼충각(三忠閣)’이라고 쓰인 현판이 있으며, 안에는 4개의 현판이 있다. 현판은 “충신종사랑행북부참봉임정언지려 정해팔월일 명정(忠臣從仕郞行北部參奉林廷彦之閭 丁亥八月日 銘旌)”과 “충신학생임광후지려 정해팔월일 명정(忠臣學生林光後之閭 丁亥八月日 銘旌)”, “충신성균진사종사랑행경기전참봉임국주지려 정해팔월 일 명정(忠臣成均進士從仕郞行慶基殿參奉林國柱之閭 丁亥八月 日 銘旌)”, “임씨양세삼충정려기(林氏兩世三忠旌閭記)”가 있다.

[현황]

도로변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사방을 두르고, 정면에 1칸의 문이 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제내리 삼충각이 있다. 임씨 삼충에 대한 사실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갑자모의록(甲子募義錄)』, 『병자참의록』에도 실려 있다. 현재 제내리 삼충각 뒷산에는 임정언의 묘가 있으며 왕동에 임씨 후손 20여 세대가 돌보고 있다. 바로 옆에 임광수와 부인 파평윤씨의 부부효열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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