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650
한자 具廷呂
영어공식명칭 Gu Jeong-ryeo
이칭/별칭 봉암(鳳巖)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92년(선조 25) - 구정려 경기전참봉
출생지 구정려 출생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거주|이주지 구정려 거주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묘소|단소 구정려 묘소 -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봉실산지도보기
성격 선무원종공신
성별 남자
본관 창원(昌原)
대표 관직 경기전참봉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에 묘소가 있는 관인.

[가계]

구정려(具廷呂)의 본관은 창원(昌原), 호는 봉암(鳳巖)이며 구종길(具宗吉)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구병(具柄)으로 진사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구환(具煥)으로 진사이고, 할아버지는 구사신(具思愼)으로 생원이며, 아버지는 구원(具愿)으로 진사이다. 외할아버지는 하동정씨 정인겸(鄭仁兼)이다. 부인은 해주오씨 오성관(吳聖寬)의 딸이다. 아들은 구일룡(具日龍)이며, 손자는 구의달(具義達), 증손자는 구한웅(具漢雄)이다.

[활동 사항]

구정려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에 거주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행의(行誼)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다. 경기전참봉은 경기전에 보관하고 있던 태조의 어진을 관리하는 참봉으로 2명이 근무하게 되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경기전참봉은 오희길(吳希吉)과 유인(柳認)이었다. 일본군이 전주로 향한다는 소식에 당시 전라감사로 있던 이광(李洸), 도사 최철견(崔鐵堅), 삼례찰방 윤길(尹趌), 참봉 오희길과 유인 등이 전주부성의 방어에 대해 논의하고, 이어서 「태조어진(太祖御眞)」을 비롯해서 『조선왕조실록』 등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논의를 했다. 이때 어진과 실록의 보관에 대해서 처음에는 땅을 파고 묻을 계책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땅에 묻었던 성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일본군이 파냈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태조의 어진과 당시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784권 614책 47궤와 기타 전적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어 이를 옮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태조어진」은 경기전참봉이 관리자였으나, 『조선왕조실록』을 전담할 사람은 없었다. 이에 지휘부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운반할 사람을 모집하게 되었으며 이때 손홍록(孫弘祿), 안의(安義) 등이 자원해서 이들과 함께 어진과 실록을 정읍에 있던 내장산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에 경기전참봉이었던 오희길과 유인을 비롯해 자원한 안의, 손홍록 등이 「태조어진」과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정읍현의 내장산에 있는 용굴암에 옮겨 보관했다.

안의와 손홍록의 공저로 보이는 『임계기사』「수직상체일기」에 따르면, 오희길은 1592년 11월 16일에 임기가 다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구정려가 26일에 처음으로 내장산에 들어와 큰 절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다. 즉 구정려는 이때부터 경기전참봉으로 내장산에서 태조의 어진 관리를 맡게 된 것이다. 유인을 대신해 경기전참봉이 된 이도길(李道吉)은 1593년 3월 4일에 처음으로 내장산으로 들어왔다. 내장산에 있으면서 구정려는 집과 내장산을 오가면서 임무를 다했다. 1593년 4월에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7월경에 「태조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충청도 아산으로 이안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7월 9일에 정읍현감 유탁(兪卓)이 부행차사원(部行差使員)이 되고 경기전참봉 구정려, 이도길과 안의, 손홍록, 희묵이 배행해서 정읍에서 출발했다. 일행은 태인·익산·정산을 거쳐 7월 19일에 아산에 이르러 충청관찰사 이산보(李山甫)에게 넘겨주고 돌아왔다. 그 뒤 「태조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은 해주로 옮겨졌다. 1597년(선조 30) 9월 「태조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으로 옮겨져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다.

[묘소]

구정려의 묘소는 완주군 봉동읍 봉실산 건좌(乾坐)에 자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구정려임진왜란이 끝난 후 호종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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