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653
한자 沈壽賢
영어공식명칭 Sim Su-hyeon
이칭/별칭 기숙(耆叔),지산(止山),문정공(文貞公)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63년(현종 4)연표보기 - 심수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04년(숙종 30) - 심수현 정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06년(숙종 32) - 심수현 설서(說書)가 됨, 지평(持平)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오름
활동 시기/일시 1708년(숙종 34) - 심수현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
활동 시기/일시 1709년(숙종 35) - 심수현 부교리(副校理), 지평(持平)을 지냄
활동 시기/일시 1710년(숙종 36) - 심수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나아감
활동 시기/일시 1714년(숙종 40) - 심수현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부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승진
활동 시기/일시 1716년(숙종 42) - 심수현 승지(承旨)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됨
활동 시기/일시 1719년(숙종 45) - 심수현 경상좌도균전사(慶尙左道均田使)가 됨
활동 시기/일시 1721년(경종 1) - 심수현 강화유수(江華留守),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22년(경종 2) - 심수현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승진
활동 시기/일시 1724년(경종 4) - 심수현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고,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숭록대부(崇綠大夫)에 가자(加資) 됨
활동 시기/일시 1727년(영조 3) - 심수현 병조판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33년(영조 9) - 심수현 영의정 됨
몰년 시기/일시 1736년(영조 12)연표보기 - 심수현 사망
출생지 심수현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묘소|단소 심수현 묘소 -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마장리(馬場里)
성격 문관
성별 남자
본관 청송(靑松)
대표 관직 경상좌도균전사(慶尙左道均田使)|강화유수(江華留守)|이조참판(吏曹參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우의정(右議政)|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문관.

[가계]

심수현(沈壽賢)[1663~1736]의 자는 기숙(耆叔), 호는 지산(止山)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심억(沈檍), 할아버지는 심약한(沈若漢)이고, 아버지는 응교(應敎)를 지낸 심유(沈濡), 어머니는 동지중추부사 조석윤(趙錫胤)의 딸이다. 장인은 이만겸(李萬謙)과 안후진(安後震) 등 두 사람이었다.

[활동 사항]

심수현은 1663년(현종 4) 완주군에서 태어났다. 42세 때인 1704년(숙종 30)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1706년(숙종 32)에 설서(說書)가 되었다. 1706년 지평(持平)을 거쳐 이태좌(李台佐) 등 16인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707년 수찬을 역임했다. 1708년(숙종 34)에는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통천군수 이정영(李挺英), 철원부사 이원명(李元命), 양양부사 성석기(成碩夔), 회양부사 남택하(南宅夏) 등을 징계하고, 영월부사 박중규(朴重圭), 울진현령(蔚珍縣令) 김세형(金世衡), 낭천현감(狼川縣監) 김현(金晛), 평창군수(平昌郡守) 이영(李瀅), 흡곡현령(歙谷縣令) 신후재(申厚載) 등에게는 표상을 내리게 했다. 1709년 부교리(副校理)가 되고 이어 지평(持平)을 지냈다. 1709년 평안도 강변의 7읍에서 무재(武才)를 실시할 때 어사로 파견되어 시험을 감독했다. 또한 청나라 사신에 관상감원(觀象監員)을 포함해 중국으로부터 달력 만드는 법을 배워오게 했다. 이후 헌납(獻納)이 되고 1710년(숙종 36)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나아갔다. 1714년(숙종 40)에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부임했는데, 이때 선정(善政)을 베푼 사실이 암행어사에 의해 밝혀져 포상을 받았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승진되었다. 1716년(숙종 42) 중앙 정계로 돌아와 승지(承旨)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1719년(숙종 45)에는 경상좌도균전사(慶尙左道均田使)가 되어 도내(道內)의 양전(量田) 사업이 불균형하고, 이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이 심하다는 소(疎)를 올렸다. 1720년(숙종 46)에 다시 승지가 되었고, 1721년에는 강화유수(江華留守)로 나아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했다. 1722년(경종 2)에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승진되고, 1724년(경종 4)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숭록대부(崇綠大夫)에 가자(加資) 되었다. 이듬해 1725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1727년(영조 3)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1727년 지경연사(知經筵事), 판의금부사를 역임한 뒤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8년 청나라에서 돌아왔으나 양사(兩司)로부터 국가를 욕되게 했다는 탄핵을 받고 문외출송(門外黜送)의 벌을 받았다. 얼마 뒤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되었으며, 1733년(영조 9)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1734년 노병(老病)을 칭하며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 뒤 1736년(영조 12)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다가 사망했으니 향년은 74세였다.

[묘소]

심수현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마장리(馬場里)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심수현의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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