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715
한자 林昌模
영어공식명칭 Im Chang-mo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임창모 체포 유배
몰년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임창모 전사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임창모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임창모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성격 의병
성별 남자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의병장.

[개설]

임창모(林昌模)[?~1909]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양회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활약하다가 적에게 잡혀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안규홍 의진에 가담해서 선봉장으로 활동했는데, 1909년 일본의 의병대 토벌전이 전개되어 일본군과 접전하던 중 전사, 순국했다.

[가계]

임창모는 성균관 진사 종부시 주부 임사수(林士壽)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임창모는 러일전쟁 후 일본의 침략행위가 노골화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즈음인 1906년 능주[현 전라남도 화순군]의 양회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임창모와 양회일은 1907년 능주를 공격하고 다시 광주를 공격하다가 날이 저물어 화순·동복의 경계인 흑토치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적에게 포위를 당했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의병들은 돌파하기로 하고 공격하다가 적에게 잡혔다. 양회일은 광주형무소에서 장흥으로 옮겨졌으나 단식 7일 만에 순국했고 임창모는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1908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임창모는 해배되자마자 보성에서 활약하고 있던 안규홍 의진에 입대해서 선봉장으로 활동했다. 6월 이후 임창모는 독립부대를 편성해서 안규홍 의진에서 분진(分陣)했다. 임창모의 의병대는 보성을 거점으로 활동했으며 전성기에는 부하가 2~3백 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1909년 10월 12일 일본의 의병대 토벌전이 전개되어 흑석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던 중 전사 순국했다.

[상훈과 추모]

임창모는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려서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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