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778
한자 選擧
영어공식명칭 Election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호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해방 이후 실시된 대통령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살펴본 완주 군민의 투표 동향.

[개설]

선거는 근대사회의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가장 확실한 정치 행위이다. 그리고 동시에 선거의 과정과 결과는 한 사회의 민주주의와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분명한 지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가 시행된 1948년 이후 2017년까지 20회의 국회의원 선거와 19회의 대통령선거가 시행되었다.

[대통령선거]

2018년 현재까지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은 제헌국회에서 선출했고,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 이후 제8대부터 제11대까지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리고 5·18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에 의해 실시된 1981년의 제12대 대통령선거는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고, 그해 12월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또 제2대 대통령선거는 6·25전쟁 기간 중에 실시되었고,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제4대 대통령선거는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그해 5월 국회에서 무효화되고 말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지역사회 및 주민의 정치적 성향을 확인할 수 있는 대통령선거는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10월유신 직전인 1971년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까지의 3회와 1987년의 제13대부터 제19대 대통령선거까지의 7회뿐이다.

사실 제5대 대통령선거도 5·16군사정변으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실시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 선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지역주민의 투표 성향은 드러나고 있다. 제5대 대통령선거는 도시는 야당을 지지하고 농촌은 여당을 지지하는 이른바 “여농야도” 성향이 두드러진 선거였다. 완주군에서도 총 유권자의 약 45%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에 투표했다. 이러한 투표 성향은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하였지만, 1967년의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최초로 지역 간 정치적 분할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거 결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약 10%가량의 표차로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지만, 박정희 후보는 대구, 부산, 경남 등 동부 지역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인 반면, 윤보선 후보는 서울, 경기, 전북, 전남, 충남 등 서쪽 지역에서 우세했다. 완주군에서도 박정희 후보가 약 2만 6000표를 얻었지만 윤보선 후보는 약 3만 5000표를 득표했다. 그리고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한층 강화되어 전라북도와 완주군에서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를 압도했다.

1972년 10월유신과 19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약 15년 이상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부활된 대통령 직선제로 선거가 실시된 1987년 12월의 제13대 대통령선거는 우리 사회에 정치적 지역주의가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거의 최대 쟁점이었던 민주와 반민주 구도가 야권의 분열로 희석되었고, 정치권은 지역감정의 동원을 선거 전략으로 삼았다. 그 결과 영남과 호남, 충청으로 분할된 정치적 지역주의가 드러나고, 이후의 선거에서 고착화 되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 경북, 김영삼 후보는 부산, 경남, 그리고 김대중 후보는 서울과 호남, 김종필 후보는 충청으로 표가 분할되었다. 완주군에서도 대통령 당선인인 노태우 후보는 약 8,700표를 얻은 반면, 김대중 후보는 약 52,000표를 득표했다. 이러한 지역주의 투표 성향은 충청의 패권자였던 김종필의 은퇴 이후 약간 희석되었지만, 영호남에서 민정당과 민주당의 패권 다툼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

1948년 5·10총선거는 단독선거 반대, 좌익계열의 선거 불참 선언 등이 있었지만, 대중의 높은 정치적 관심과 참여 속에서 치러졌다. 전라북도에서는 96.9%의 투표 참여율로 22명의 제헌 의원을 선출했다. 전국적으로 무소속이 42.5%의 의석을 차지하고, 대한독립촉성회[독촉]이 27.5%, 한민당이 14.5%를 차지했는데, 완주군에서는 2개의 의석을 대한독립촉성회 소속이 모두 차지했다. 이른바 ‘여농야도’ 현상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완주군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1960년 4·19혁명 이전에 시행된 제2대~제4대 선거에서는 완주군 당선자는 대부분 자유당 소속이고, 4·19혁명 이후에 치러진 제5대 선거에서는 2명 모두 민주당 소속이었다. 그리고 다시 5·16군사정변 이후 군부가 집권한 이후에는 제6대~제8대 선거 모두 공화당이 승리했다. 10월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은 선거구 통합과 함께 중선거구제를 채택하는데, 완주군은 전주 일부와 선거구가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1985년 제12대 선거까지는 공화당과 신민당이 의석을 하나씩 나눠 가졌다. 6월항쟁 이후 1988년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완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완주군은 이후 선거구가 여러 차례 바뀌어 완주·임실[제16대], 김제·완주[제17대~제19대], 완주·진안·무주·장수[제20대] 등으로 변해 왔다. 그러나 지역주의 성향은 지속하여, 최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완주군에서는 민주당[당 이름 : 평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더불어민주당으로 변화] 후보가 변함없이 당선되고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N** 2020년에 맞게 수정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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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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