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110
한자 衣生活
영어공식명칭 Clothing Lif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진명숙

[정의]

전라북도 완주 군민들이 입어 왔던 의복 및 이와 관련한 생활 풍속.

[개설]

의생활의 역사는 고조선에서부터 삼국, 고려, 조선을 거쳐 개항기를 지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변해 왔다. 신분 사회였던 조선시대까지 의복은 왕족, 양반, 서민 등에 따라 분명하게 구별되었다. 의복은 고유 한복으로 바지에다 저고리를 입었으며, 저고리는 천으로 만든 허리띠에 옷고름 또는 단추를 한 개 달았다. 개항기 이전까지 남자 옷의 기본 구조는 바지에다 저고리였다. 상의에는 두루마기, 마고자, 조끼, 저고리, 적삼, 등걸이, 토시, 하의에는 속고의, 고의, 바지, 대님, 행전, 요식에는 허리띠, 주머니, 이식에는 버선과 신이 있다. 여성의 경우 저고리와 치마가 기본 구조였다. 1900년대 들어서 저고리 소매통이 매우 좁고 길이도 짧아져 가슴을 감는 허리띠가 필요했다. 여성 복식의 최대 변화는 활동하기에 편리한 검은색의 짧은 통치마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양 속옷이 들어오면서 한복 속옷은 차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대신 속치마는 개항기에 나타났다. 한편 신발은 짚신이었다. 겨울철에 사랑방이나 안방에서 일 년 동안 신을 짚신으로 삼아 놓는다. 양말은 거의 신지 않았고, 버선이 있었으나 부유층에서나 처녀들이 뜨개질로 속내의나 양말, 장갑을 사치품으로 사용하였을 따름이다. 왜구들이 들어와 나막신을 보급하였고, 일제강점기 말에 고무신이 나왔다. 조선 후기 서양의 신문물 도입, 일제강점기, 갑오개혁 등 개항기에 수천 년간 입어오던 한복이 양복으로 바뀌는 등 의생활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반 서민의 복식은 관복, 군복, 개화 인사들의 복식처럼 빨리 양복으로 바뀌지는 못하였다.

[전통의복]

1958년 음력 7월 15일인 백중날, 봉동읍 낙평리 경로회 주민들은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 찍힌 남성 30명, 여성 48명 가운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위아래로 흰 한복을 입었다. 그 한 사람도 윗옷은 흰옷이다. 남성은 흰 두루마기를, 여성은 흰 저고리를 입었는데, 아마도 사진을 찍기 위해 흰색의 전통복을 입기로 약속을 한 듯하다. 사진에 할아버지 한 분은 갓을 쓰고 있었고, 할머니들은 대부분 비녀 꽂은 머리를 하고 있다. 낙평리 뒷새터마을에 사는 부안할머니의 남편은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는데, 사진 속 훈장의 복장은 한복 두루마기와 바지였다. 1938년 낙평리 신상마을에 사는 윤구, 태구 형제 가족사진을 보면, 태구는 양복을, 윤구는 남방과 면바지로 된 일상복을 입었지만, 윤구 처와 태구 처, 자녀들은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볼 때, 일제강점기에는 서양식과 전통한복이 혼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대의복]

1968년 봉동읍 봉성초등학교 14명의 교직원끼리 찍은 사진을 통해 이 시기 외출복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남성들은 대부분 와이셔츠나 티셔츠에 양복을 입고 있고, 여성들은 겨울용 재킷을 입고 있다. 1956년 27회 봉동초등학교 동창회를 기념하여 찍은 사진에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교복을, 여자아이들은 일부는 한복을, 일부는 점퍼와 바지로 된 평상시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한편, 2016년에 열린 〈삼례人 기록전〉 전시회에 소개된 삼례읍 주민의 여름철 작업복을 보면, 여성은 ‘몸빼’라 불리는 편한 바지와 헐렁한 남방, 혹은 티셔츠를, 남성은 면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60-80년대 완주 지역 의복 관련 공업 및 상업]

1962년 제2차 경제개발계획 추진에 따라 완주 지역에도 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1960년대 완주 삼례읍, 조촌면 등에 피혁공장, 합사공장 등이 설립된다. 삼례읍 삼례리의 삼례피혁공장은 1963년 설립되어 1968년까지 운영되었으며, 10~15명 가량의 종업원이 근무했다. 그리고 조촌면[1987년 전주시로 편입]의 2개 섬유공장에서는 54명가량이 근무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1974년에는 조촌면에 견직물을 취급하는 홍신실업이, 1977년에는 삼례읍에 메리야스를 생산하는 건강섬유가 설립되는 등 1970년대 섬유공장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면, 실크 등의 기성 의복이 대중화되면서 수요가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다. 1970년 견수 방사는 3,017k에서 1978년에는 36,000k로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1980년대에는 삼례읍에 2개의 섬유공장이, 상관면에 견, 면직물을 생산하는 2개의 공장이, 1990년대에는 이서면에 5개의 원단·원사·방사 공장이 설립되었다.

한편, 1987년 개발된 이서특별농공단지에는 메리야스 원단을 생산하는 백양이, 면사를 생산하는 신한방이, 면직물을 생산하는 한흥물산이 입주하여, 공장을 가동했다. 1994년 말 기준으로, 섬유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은 14개였으나, 2016년 말에는 4개로 줄어들었다. 1961년 말 완주 지역에서 의복을 취급하는 도소매업체는 14개소에서, 1967년에는 37개소로, 1979년에는 55개소로 많이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읍면별로는 삼례읍이 26개소로 가장 많았고, 봉동읍[13개소], 조촌면[6개소], 고산면[4개] 순이었다. 전주시 도심을 중심으로 상권이 팽창하면서, 전주시에서 의복을 구입하는 주민이 증가하자 완주군의 의복 도소매업체도 크게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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