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021
한자 二憂堂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이곡길 69-5[서변동 8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도성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이우당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8년 - 이우당 1차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1년 - 이우당 2차 중건
이전 시기/일시 2009년 - 이우당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에서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80으로 이전
현 소재지 이우당 - 대구광역시 북구 이곡길 69-5[서변동 80]지도보기
원소재지 이우당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지도보기
성격 재사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하빈이씨 감사공파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이경을 추모하는 재사.

[개설]

할아버지는 하빈이씨 시조인 예부상서 이거이며, 아버지는 이정기(李挺基)이다. 어머니는 원천석(元天錫)의 딸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이우당(二憂堂)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1337~?]을 추모하는 재사이다. 이경의 호는 이우당, 본관은 하빈(河濱)이며, 할아버지는 하빈이씨 시조인 하빈군(河濱君) 이거(李琚)이다. 이경은 6세 때 외조부인 원천석에게 글을 배웠는데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이경은 15세 때 고려 충정왕을 만났다. 당시 충정왕은 이경이 사서육경을 모두 읽었으며, 이색에게 배우고 정몽주와는 한 마을에서 함께 공부하였다는 말을 듣고, 서책과 지필묵 등을 하사하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1360년(공민왕 9) 진사시에서 정몽주가 장원급제를 할 때 이경도 24세의 나이로 12위로 함께 급제하였다. 이후 화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왕 시절에는 이인임 일파에 의하여 정몽주 등과 함께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이경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1392년 10월 16일 두문동으로 들어가 ‘두문동 72현’이 되었다. ‘이우당’이라는 호는 야은 길재가 이경의 집에 당호(堂號)로 써 준 것이라고 한다. ‘두 가지 걱정’, 곧 이우(二憂)는 ‘나아가도 나라 걱정, 물러나도 나라 걱정[進亦憂, 退亦憂]’이라는 뜻이다.

[위치]

이우당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80에 있다.

[변천]

연경동에 세거하는 하빈이씨 감사공파 후손들에 의하여 1920년에 건립되었을 당시 이우당은 지금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들연경’에 있었다. 이후 1978년에 1차 중건이 있었고, 2001년에 2차 중건이 있었다. 그리고 2009년 11월 3차 중건 당시 이우당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형태]

이우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전면 5칸에 모두 유리문을 달았다. 같은 경내에 단청을 입힌 영정각이 있다.

[현황]

이우당에는 같은 경내에 이경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감사공파 파조인 경운(京雲) 이징하(李徵夏)의 제단비를 비롯한 여러 유허비·송덕비 등이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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