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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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懸里山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리 353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방문식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3년 8월 - 현리산성,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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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현리산성 -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리 353 |
성격 | 산성 |
양식 | 산정식 |
크기(높이, 길이, 둘레) | 607.93m |
[정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리에 있는 삼국 시대 산성.
[조사 경위]
현리산성에 관한 조선 시대 이전 기록은 없고, 근현대 이후 자료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조선총독부, 1942]에 “하면 면사무소를 서방(西方)으로 하여 거리 약 10정(町) 되는 상면과 하면 경계 산정에 있으며, 성벽은 거의 붕괴되어 석축 일부만 남아 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과 『한국의 성곽과 봉수(상)』에서는 현재 흔적이 없다고 하였으나, 현지에 대한 확인 없이 서술한 것이다.
이후 1999년 발간된 『가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 처음으로 상세한 현황이 보고되었다. 1999년 조사 당시 현리산성은 이미 현대의 참호, 벙커 등 군사 시설물이 개설되어 원형이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 또한 성벽 부근 수목의 성장으로 지속적으로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가평군이 현황을 파악하고 향후 유적의 보존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에 의뢰하여 2003년 8월 지표 조사 연구 용역을 진행하였다.
[위치]
현리산성은 가평군 조종면 현리 북쪽 353고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이다. 전체적인 형세는 산 정상부와 능선을 끼고, 배후에 방천(防川)과 농경지를 거느린 모양새이다. 산성의 방천 기능을 하는 조종천을 끼고 현리, 신상리, 신하리, 연하리 등 농경지가 일찍부터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현리 일대는 경기 북부 지역에서 한강 중상류 쪽으로 진출할 때 길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형태]
현리산성은 해발 290~350m 내외의 낮은 정상과 능선을 따라 잔존해 있다. 전체 형태는 남북으로 긴 부정형의 성벽이며, 전체 길이는 약 607.93m이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산 정상부에 축조하였기에 산정식(山頂式)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석축 성이면서도 조성 과정에 삭평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산성 서벽 구간에서는 내부 공간을 계단식으로 삭평한 흔적이 있고, 북벽 구간에서는 능선 외측을 절개하여 성벽을 따라 도는 길을 넓게 구축하고 성벽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다만 일부 구간에서는 석축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삭평만으로 구축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현황]
현리산성은 북측 정상부 고지와 서측 완만한 경사지의 서문지, 남측 가장 낮은 부분의 너른 평탄지로 크게 구분된다. 산성 내부에서 가장 너른 평탄지를 중심으로 우측은 급경사지로 막혀 있고, 위쪽은 완경사지가 형성되어 있다. 석축은 대체로 내탁식(內托式)으로 축조되었으며, 대개 자연석이나 약간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였다. 석축은 기본적으로 장방형 쌓기이나 후대에 재수축을 하면서 열이 맞지 않는 부분도 관찰된다. 돌 크기는 대체로 가로 30㎝, 두께 15㎝, 큰 돌은 가로 50㎝, 세로 15㎝ 정도이다. 석축 방식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서벽과 남벽인데, 내외부의 들여쌓기와 보축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성문 터는 석축이 모두 와해되어 형태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서문 터, 북문 터, 외성 문 터에서 기와 편이 수습되어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현리산성 내 건물 터로 추정되는 공간은 서벽 남단부, 서문 터 내측, 산성 정상부 서측, 북벽 동단 지점, 산성 정상부, 산성 정상부 동측, 동벽 중간의 굴곡부 내측, 남벽 내측 등 8개 지점이다. 용도나 성격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지표상 흔적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정상부 일대 건물 터에서 가장 많은 수의 기와 편이 수습되어 중요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현리산성에서 신앙 유적 흔적을 2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 곳은 정상부 일대로, 와질성 토제마(土製馬) 머리와 다리, 많은 도자기 편이 발견되었다. 고대 산성은 서낭당이 내부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기에 신앙 유적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북벽 중간 지점에 있는 이북망향제단비 근방의 큰 바위도 신앙 관련 시설로 추정된다. 이곳은 남향으로 큰 바위[가로 3.3m, 높이 2.6m]가 있고, 전면에 각각 4.4m, 6.1m 크기의 기단 2개가 5m 간격을 두고 위아래로 있다. 이북망향제단비 뒤에 있는 바위에는 인공적으로 바위를 쪼아 불상 광배와 같은 모양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는데, 비를 설치하기 전에 신앙과 관련된 장소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의의와 평가]
현리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석축 유구나 축성 방식만으로 정확한 축조 연대와 사용 시기를 판단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사단은 대체로 처음 축조된 시대를 삼국 시대, 주체를 백제, 혹은 통일신라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 중부 지역은 삼국 시대에 공방이 격렬하게 이루어진 곳이었고, 현재 현리산성 일대를 장악한 국가는 백제였다. 또한 현리산성이 다른 백제 산성들처럼 산릉 외사면을 삭토하여 내환을 만들고 외변에 석축 한 점, 작은 산정식 산성이라는 점은 백제 산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유물들의 연대도 최대 삼국 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통일신라 이전에 처음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