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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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己和 |
영어공식명칭 | Gihwa |
이칭/별칭 | 득통(得通),함허(涵虛),수이(守伊),무준(無準). |
분야 | 종교/불교,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
시대 | 조선/ 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성환 |
[정의]
경기도 가평군 현등사에 승탑이 있는 조선 전기 승려.
[개설]
기화(己和)[1376~1433]의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속성은 유씨(劉氏)이다. 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涵虛)이다. 첫 법명은 수이(守伊), 첫 법호는 무준(無準)이다. 아버지는 전객시(典客寺) 사(事) 유청(劉聽)이다.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조선 초기 배불 정책에 맞서 유학의 잘못된 불교 비판을 시정하고자 노력하였다.
[활동 사항]
기화는 어린 시절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는데,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에서 출가하였다. 1397년(태조 6)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무학왕사(無學王師)에게 법요(法要)를 듣고 여러 산을 돌며 수행하다가 1404년(태종 4) 다시 회암사로 돌아왔다.
1406년(태종 6)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에서 『반야경』을 설법하였고, 1414년(태종 14)에는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峯寺)에서 작은 방을 구해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짓고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하였다. 1420년(세종 2)에는 오대산에 들어가 오대(五臺)의 여러 성인들을 공양하였다. 이때 영감암(靈鑑庵)에서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공양하였는데, 꿈에 신승(神僧)이 나타나 이름을 ‘기화’, 호를 ‘득통’으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1421년(세종 3) 세종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세종의 어머니 원경왕태후 민씨의 명복을 빌고, 종실과 신하들에게도 설법하였다. 1424년(세종 6)에는 대자사에서 나와 길상산(吉祥山)·공덕산(功德山)·운악산(雲岳山) 등을 돌며 수도하였다. 1431년(세종13) 문경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를 중수하고 머물다가 1433년(세종 15) 입적하였다. “죽음에 이르러 눈을 들어보니 시방(十方)이 벽락(碧落) 하나 없는데도 길이 있으니 서방 극락이다.”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사상과 저술]
기화는 선승(禪僧)이었지만, 교(敎)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기화의 선 사상은 현실과 일상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조선 초기 유학자들이 불교를 허무주의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유·불·도 삼교 일치를 주장하였다. 삼교 일치 사상은 최치원(崔致遠)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기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저서로는 『원각경소(圓覺經疏)』, 『금강경오가해설의』, 『윤관(綸貫)』,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등이 있다. 그 밖에 『반야참문(般若懺文)』 1권이 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