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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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仁贊 |
영어공식명칭 | Kim Inchan |
이칭/별칭 | 의지(義之),의암(毅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이천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성환 |
활동 시기/일시 | 1376년 - 김인찬 북청천호 재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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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90년 - 김인찬 밀직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392년 - 김인찬 동지밀직사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392년 - 김인찬 중추원사·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392년 - 김인찬 사망 |
부임|활동지 | 북청 - 함경남도 북청군 |
묘소|단소 | 김인찬 단소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이천리 |
성격 | 무관 |
성별 | 남 |
본관 | 양근 |
대표 관직 | 중추원사|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단과 비가 있는 고려 말~조선 초 무신.
[가계]
김인찬(金仁贊)[?~1392]의 본관은 양근(楊根)이다. 자는 의지(義之)이고, 호는 의암(毅菴)이다. 가계는 불분명하며, 후에 양근 김씨(楊根 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활동 사항]
김인찬은 1376년(우왕 2)에 북청천호(北靑千戶)[북청은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로서 고려에 해동청(海東靑)을 바치고 우왕에게 백금 50냥을 하사받았다. 여진과 교섭이 잦았던 북청 지방의 토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383년(우왕 9) 이성계(李成桂)의 부하가 되었다. 당시 이성계는 동북면(東北面)에서 안변(安邊)[지금의 강원도 안변군]으로 이동 중에 밭 가운데 있는 뽕나무에 앉아있던 새 두 마리를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고 한다. 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김인찬은 이성계의 활 솜씨를 보고 감탄하여 한충(韓忠)과 함께 이성계의 휘하로 들어갔다. 김인찬은 이성계에게 무재(武才)로 발탁되었으며, 1388년 요동정벌에도 참여하였다. 위화도회군 뒤 1390년(공양왕 2)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고, 1392년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중추원사(中樞院使)·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를 지내며 태조의 친병(親兵)을 통솔하였다.
[묘소]
김인찬의 단(壇)과 비(碑)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이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인찬은 죽은 뒤 개국 공신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되었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근성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