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569 |
---|---|
한자 | 盧弘器 |
영어공식명칭 | No Honggi |
이칭/별칭 | 사달(士達),사주(士周),하빈(河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근하 |
출생 시기/일시 | 1589년 - 노홍기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노홍기 사마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노홍기 병자호란 때 인조 호종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노홍기 용안현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3년 - 노홍기 의금부 도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노홍기 별시 문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47년 - 노홍기 사망 |
부임|활동지 | 용안현 -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
부임|활동지 | 익산군 - 전라북도 익산시 |
묘소|단소 | 노홍기 묘터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샛골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풍천 |
대표 관직 | 의금부 도사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었던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노홍기(盧弘器)[1589~1647]의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자는 사달(士達)·사주(士周), 호는 하빈(河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좌승지(贈左承旨)에 추증된 노인(盧禋), 할아버지는 사복시 정(正)에 추증된 노응복(盧應復),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을 지낸 노선(盧宣)이다. 어머니는 나주 정씨(羅州 丁氏)로,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낸 정윤우(丁胤祐)의 딸이고,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복순(李福純)의 딸이다. 형은 노원기(盧遠器)이고, 동생은 노중기(盧重器)이다.
[활동 사항]
노홍기는 광해군 대에 과거를 보려 하였지만 인척이 시제를 미리 알려주자 오히려 과거를 포기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1623년(인조 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30년(인조 8) 능참봉(陵參奉)이 되었고, 1634년(인조 12)에는 봉사(奉事)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직장(直長)으로서 남한산성에 들어가 인조를 호종하였다. 환도한 뒤에 공을 인정받아 주부(主簿)로 승진하였고, 이어 사헌부 감찰(監察)에 올랐다.
1638년(인조 16)에는 용안현감(龍安縣監)[용안현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으로 나갔으나, 1642(인조 20)에 병으로 해임되었다. 1643년(인조 21)에는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 의금부 도사로 재직 중,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 심기원(沈器遠)이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노홍기는 중요한 공모자 중 한 명인 광주부윤(廣州府尹) 권억(權澺)을 체포하는 공을 세웠다. 공을 인정받아 심기원의 옥사가 끝난 뒤 4품직을 제수 받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645년(인조 23) 56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역임하였고, 동시에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이후 병을 얻어 1646년(인조 24)에 사망하였다. 도승지·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
노홍기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샛골 안에 있었으나 화장하여 없어졌고, 신도비 역시 없어진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