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06 |
---|---|
한자 | 李文誠 |
영어공식명칭 | Lee Moonseong |
이칭/별칭 | 명중(明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근하 |
출생 시기/일시 | 1503년 - 이문성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532년 - 이문성 별시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45년 - 이문성 창원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57년 - 이문성 황주목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60년 - 이문성 평산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63년 - 이문성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이문성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이문성 길주목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75년 - 이문성 사망 |
부임|활동지 | 이산군 - 자강도 초산군 |
부임|활동지 | 창원도호부 - 경상남도 창원시 |
부임|활동지 | 경상우도 - 경상도 |
부임|활동지 | 황주목 - 황해북도 토산군 |
부임|활동지 | 평산도호부 - 황해북도 평산군 |
부임|활동지 | 경상우도 - 경상도 |
부임|활동지 | 전라우도 - 전라도 |
부임|활동지 | 길주목 - 함경북도 길주군 |
묘소|단소 | 이문성 묘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
성격 | 무관 |
성별 | 남 |
본관 | 전의 |
대표 관직 | 전라우도수군절도사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무신.
[가계]
이문성(李文誠)[1503~1575]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는 명중(明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병조 참의 이예장(李禮長), 할아버지는 판결사(判決事) 이시무(李時珤), 아버지는 양주목사(楊州牧使) 이공달(李公達)이다. 어머니는 광주 김씨(光州 金氏)로, 광원군(光原君) 김백겸(金百謙)의 딸이다. 부인은 단양 우씨(丹陽 禹氏)이며, 전서(典書) 우예손(禹禮孫)의 딸이다. 재종숙(再從叔) 이인손(李仁孫)에게 입양되었다. 아들은 사헌부 지평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한 이제신(李濟臣)이다.
[활동 사항]
이문성은 1532년(중종 27)에 별시(別試)로 치러진 무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내직으로 선전관(宣傳官)·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 외직으로 이산군수(理山郡守)[이산군은 지금의 자강도 초산군] 등을 거쳤다. 1536년(중종 31)에 상품으로 아마(兒馬)[길이 들지 않은 어린 말]를 줘야하는 것을 숙마(熟馬)[길이 잘 든 말]로 바꿔준 일로 파직당할 뻔했으나 용서받았다.
1545년(인종 1)에는 상의원(尙衣院) 첨정(僉正)으로서 산릉(山陵)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다. 이어서 창원부사(昌原府使)로 부임하여 3년간 직임을 다하였는데, 지역 백성들의 요청으로 유임되었다. 이후 가덕진첨절제사(加德鎭僉節制使)와 경상우도수군절제사(慶尙右道水軍節制使)를 역임하였는데, 경상도에 닥친 흉년과 왜구의 침입을 적절히 대처하여 공을 인정 받았다. 1557년(명종 12)에는 황주목사(黃州牧使)[황주목은 지금의 황해북도 토산군]로 부임하여 황해도 지역에서 발생한 도적 무리를 소탕하였다. 하지만 이후 백성들에게 형벌을 가혹하게 쓰고 국고를 횡령해 사적인 이익을 채운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1560년(명종 15)에는 평산부사(平山府使)[평산부는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로 부임하였고, 1563년(명종 18)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566년(명종 21)에는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옮겨 1년간 근무하였고, 1567년(명종 22) 길주목사(吉州牧使)[길주목은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로 부임하였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지내다가 1575년(선조 8)에 사망하였다.
[묘소]
이문성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