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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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希籍 |
영어공식명칭 | Chang Heeje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금대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임현채 |
출생 시기/일시 | 1546년 2월 10일 - 장희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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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9년 10월 2일 - 장희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05년 - 장희적 선무원종공신녹권을 받고 통정대부·갑산부사에 추증 |
묘소|단소 | 장희적 묘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금대리 사현 |
성격 | 무관 |
성별 | 남 |
본관 | 인동 |
대표 관직 | 갑산부사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관인.
[가계]
장희적(張希籍)[1546~1599]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장운산(張雲山)이며, 어머니는 김치덕(金致德)의 딸이다. 부인은 온양 정씨(溫陽 鄭氏)와 나주 박씨(羅州 朴氏)이다. 아들은 장두하(張斗河)와 장두방(張斗房)이다.
[활동 사항]
장희적은 임진왜란 때 판운량사(判運糧事)로 군량 수송에 참가하였다. 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죽은 뒤인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을 받았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갑산부사(甲山府使)[갑산부는 지금의 양강도 갑산군]에 추증되었다.
장희적은 두 아들에게 집안의 영달보다 자손이 번성하고 복을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장희적이 죽고 묘자리를 알아볼 때, 장희적의 두 아들이 지관(地官)을 번갈아 가며 등에 업고 강 건너 단지미 고개까지 갔다. 그곳에 가서 지관이 금대리를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저 산 너머에 명당 자리가 있다. 바로 쓰면 삼대 정승(政丞)이 나올 것이오, 뉘어 쓰면 효자가 많이 나고 또 자손이 번성할 자리니, 둘 중 하나를 고르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두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장희적의 묘를 뉘어 썼다고 한다. 또한 두 아들의 묘는 장희적의 묘 앞 좌우에 ‘품자(品字)’ 모양으로 있는데, 자식이 부모를 위해 부모의 묘를 지켜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묘소]
장희적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금대리 사현(沙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