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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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起南 |
영어공식명칭 | Choi Kinam |
이칭/별칭 | 여숙(與叔),만곡(晩谷),만옹(晩翁),양암(養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현채 |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에 은거하였던 조선 시대 문신.
[가계]
최기남(崔起南)[1559~1619]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는 여숙(與叔)이고, 호는 만곡(晩谷)·만옹(晩翁)·양암(養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최명손(崔命孫), 할아버지는 최업(崔嶪), 아버지는 좌승지에 추증된 최수준(崔秀俊)이다. 어머니는 호조 참의에 추증된 남상질(南尙質)의 딸이며, 부인은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아들은 총 다섯인데, 셋째가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주장한 최명길(崔鳴吉)이다.
[활동 사항]
최기남은 성혼(成渾)[1535~1598]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입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때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 등이 정여립의 무리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투옥당하였다. 당시 성균관 사학 유생이었던 최기남은 상소를 올려 투옥당한 이들을 구원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부모를 데리고 피난하였으며, 전후인 1600년(선조 33)에는 왕자의 사부(師傅)에 임명되어 3명의 왕자를 가르쳤다.
1602년(선조 35)에는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후 성균관 전적, 병조 좌랑, 세자시강원 사서, 예조 정랑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에는 시관(試官)에 임명되었는데, 과거 시험을 끝내고 하루가 더 지나 복명하였다는 이유로 추고를 받았다. 1605년(선조 38)에는 함경북도병마평사로 부임하였으나, 병에 걸려 경성(鏡城)[지금의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1606년(선조 39)에는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예조 정랑, 병조 정랑, 세자시강원 시강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홍문관에 재직하며 군국대무(軍國大務)에 대한 6조의 소를 올리고 스승 성혼의 원통함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12년(광해 4)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고,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부임하였다. 영흥부사로 재직하던 1613년(광해 5)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무고를 받고 사사되었는데, 최기남도 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가평에 은거하며 집을 짓고 ‘만곡정사(晩谷精舍)’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1619년(광해 11) 사망하였다.
[묘소]
최기남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오야동에 있다. 묘비명은 아들 최명길의 부탁을 받아 장유(張維)[1587~1638]가 지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