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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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弼圭 |
영어공식명칭 | Gim Pilgyu |
이칭/별칭 | 명심(明審),김문규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범성 |
출생 시기/일시 | 1874년 1월 28일 - 김필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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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김필규 양주군 만세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7월 27일 - 김필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9년 - 김필규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 |
출생지 | 김필규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 |
거주|이주지 | 김필규 이주지 -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월산리 |
활동지 | 김필규 활동지 - 경기도 양주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양주 만세시위 참여 |
[정의]
경기도 가평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필규(金弼圭)[1874~1919]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심(明審), 이명(異名)은 김문규(金文圭)이다. 1874년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달전리[현 가평읍 달전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평산신씨 신도균(申道均)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필규는 10세 이전부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완독했을 정도로 총명했다고 전해지며, 21세에는 한문서당의 훈장을 했다. 이후 양주군 화도면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전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양주군에서는 3월 13~14일 양일간 미금면(渼金面) 평내리(坪內里)에서 처음 만세시위가 일어난 뒤 와부면(瓦阜面) 송촌리(松村里), 덕소리(德沼里) 등 주변지역으로 전파되었다. 3월 18일 이달용(李達鎔), 김원석(金元石), 이승면(李承冕), 남궁우룡(南宮又龍), 윤준(尹濬), 이윤원(李允遠), 구영식(具永植), 권은(權殷), 강선원(姜善遠) 등이 답내리(畓內里)·월산리(月山里) 주민 200여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에 출동한 일제 군경이 출동하여 주도인물 3인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 1,000여명의 군중이 마석우리(磨石隅里)에 있는 헌병주재소 앞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검거된 인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들은 시위하는 군중들을 향해 발포하였고, 이달용, 손복산(孫卜山), 신영희(申英熙),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등 5인이 사망하였다. 또한 이재혁(李載赫), 윤균(尹均), 강덕여(姜德汝), 윤정석(尹丁石), 원대현(元大鉉) 등이 부상당하였다. 일제측 기록에는 5~6명이 부상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재한 선교사 자료에 따르면 20여 명이 쓰러졌다고 한다.
이튿날 일본 헌병들은 주도인물을 체포하였는데, 이 가운데 김필규를 비롯하여 김원석, 이승면, 남궁우룡, 윤준, 이윤원, 구영식, 권은, 강선원 등이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김필규는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6개월형을 언도받았으며,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21일 고등법원으로부터 상고 기각당하고 복역하던 중 7월 27일 옥중 순국하였다. .
[상훈과 추모]
김필규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