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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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圭鵬 |
영어공식명칭 | I Gyubu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성주현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 이규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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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3·1운동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이규붕 북면 만세시위 전개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 이규붕 사망 |
출생지 | 이규붕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
거주|이주지 | 이규붕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
활동지 | 북면 만세시위 전개 - 경기도 가평군 북면 |가평읍 |
묘소 | 이규붕 묘 -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산천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주도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규붕(李圭鵬)[1875~1950]의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도여(圖汝)이다. 1875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형은 이규봉(李圭鳳)이다.
[활동 사항]
이규붕의 형 이규봉은 고종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1919년 3월 1일 서울에 갔다가 『독립신문』과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이규붕, 이규봉의 장남 이윤석(李胤錫), 최종화(崔宗和) 등에게 3·1운동을 전하였다. 그리고 가평 지역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규붕은 주민에게 연락 및 동원하는 것을 담당하였고, 시위의 선두를 이끌 청년행동대를 조직하였다.
이규붕은 3월 15일 유성남(柳成男)·권순(權洵)과 함께 가평군 북면에서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면사무소·보통학교 등지를 다니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6일에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가평읍내로 진출하였으며, 청년행동대와 선두에서 대오를 편성하고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인근 주민들도 호응하여 시위대는 4,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규붕은 시위대와 함께 군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헌병대가 있는 주재소를 향하다가 일본군의 저지로 해산당하였다. 일본군은 주동자와 행동대원 20여 명이 검거하였다. 이규붕은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다음날 체포자의 석방을 위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등 가평 지역의 만세시위에서 행동대원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묘소]
이규붕의 묘는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산천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