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48 |
---|---|
한자 | 張基榮 |
영어공식명칭 | Jang Gi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범성 |
출생 시기/일시 | 1887년 5월 1일 - 장기영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장기영 북면 만세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3월 19일 - 장기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장기영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 |
출생지 | 장기영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리 1012 |
거주|이주지 | 장기영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리 1012 |
활동지 | 장기영 북면 만세시위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일대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북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장기영(張基英)[1887~1950]의 아버지는 장두환(張斗煥)이며, 1887년 5월 1일 가평군 북면 화악리 1012에서 태어났다. 양반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활동 사항]
장기영은 유년 시절 의리가 있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천도교에 입교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곧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고종 인산일을 맞아 상경했던 가평군 북면 목동리 출신 이규봉(李圭鳳)은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서울에 있는 제자 정한교(鄭漢敎)와 신태연(申泰鍊), 민영순(閔泳純)와 만나 3·1운동의 경위를 전해듣게 되었다. 이규봉은 만세시위를 가평에 전파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몰래 숨겨 가평으로 돌아왔다.
3월 6일 이규봉은 장남인 이윤석(李胤錫)과 제자인 정흥교(鄭興敎)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가평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튿날인 3월 7일 이규봉은 아회(雅會)를 구실로 하여 뜻을 함께할 주민들을 모았다. 이에 장기영을 비롯한 정성교(鄭聖敎), 이만석(李萬錫), 정재명(鄭在明), 이병찬(李炳贊), 최용화(崔容和) 등 약 20여명이 함께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3월 15일에 거사를 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준비하고 독립만세를 촉구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를 위해 기독교·천도교인들과 협력하고, 옥양목과 한지를 이용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최종화(崔宗和)와 최용화가 태극기 제작을 담당하였는데, 각 서당마다 문창호지 100여장을 거두고, 부녀자들의 도움으로 3월 13일까지 1,800여매의 태극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또한 비밀통문 500여매를 제작하여 이를 3월 14일 밤 정기복(鄭基福), 정천수(鄭天洙), 최인화(崔仁和)가 북면 각 동리에 전달하면서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거사일인 3월 15일 장기영과 북면 주민들은 먼저 북면의 성황당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이어 북면사무소 앞으로 나아갔다. 북면사무소에 도착할 즈음에 인원이 더욱 늘어나 수백명에 이르렀고, 만세를 부른 뒤 태극기를 앞세우며 가평 읍내로 가서 또 다시 독립만세를 불렀다. 장기영은 제1호기를 들고 만세시위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가평 읍내에는 군청과 면사무소, 보통학교, 천도교구실, 우편국 등이 위치하고 있었음으로 주민들은 나누어 곳곳에서 오후까지 만세를 외쳤다.
저녁이 되자 일본 경찰은 주도인물 색출에 나섰고 이윤석, 정흥교, 최종화, 최용화, 최기선(崔基善), 최인화 등이 체포되었다. 장기영은 체포되지 않은 정성교, 홍종선(洪鍾先), 이교성(李敎星), 장순현(張順賢), 이영헌(李英憲) 등과 함께 체포된 주민들을 구할 계획을 세우고, 이튿날인 3월 16일 약 200여명의 북면 주민과 함께 목동리에 모여 가평 헌병 분견소를 향해 이동하였다. 이들이 목동리 당고개를 지날 무렵 경성에서 출동한 경성헌병분대원들과 마주쳤는데, 헌병들이 이들을 제지하자 장기영은 선두에 서서 주민들에게 여기서 도망가면 효력이 없다며 주민들을 설득하고, 헌병들에게 “죽일테면 죽여라”라고 외치며 달려 들었다. 이에 헌병들이 도망치자 돌을 던지고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았다. 헌병들은 발포를 하고 장기영을 비롯한 주도인물들을 체포하였다. 장기영은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19년 4월 26일 징역 4년을 언도받았다. 이는 가평 북면 만세시위 주도인물 중 가장 높은 형량이었다. 이에 상고하여 1919년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일부 감형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장기영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