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749
한자 張順天
영어공식명칭 Jang Sunche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범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장순천 북면 만세시위 참여
출생지 장순천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장순천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북면 만세시위 참여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북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장순천(張順天)가평군 북면 목동리 출신이다. 정확한 생몰년도와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활동 사항]

장순천은 가평지역 교육가인 이규봉(李圭鳳)의 밑에서 글을 배웠다고 전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가평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3·1운동 당시 고종의 인산일로 서울에 가있던 이규봉은 서울 시내에서 만세시위를 보고 자신의 문하생이었던 정한교(鄭漢敎), 신태연(申泰鍊), 민영순(閔泳純)을 만나 경위를 물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로, 이규봉에게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며 가평 지역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나도록 이 소식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규봉은 제자들이 준 「독립선언서」 1매와 서울 시내에서 얻게 된 「독립선언서」 1매, 『독립신문』 1매를 몰래 숨겨서 가평으로 돌아왔다.

3월 6일 이규봉은 장남 이윤석(李胤錫)과 제자인 정흥교(鄭興敎)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이튿날인 3월 7일 주민들을 불러 모아 만세시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때 정성교(鄭聖敎), 장기영(張基英), 이만석(李萬錫), 정재명(鄭在明), 이병찬(李炳贊), 최용화(崔容和) 등이 이에 참여하기로 하였으며 장순천 또한 이규봉의 문하생으로 이에 참여하여 태극기와 선언서, 통문의 제작에 필요한 한지를 구입하여 주었다. 이러한 도움으로 인해 거사가 이루어진 3월 15일 이전까지 1,800여 개의 태극기와 비밀통문 500여 매를 제작할 수 있었다. 거사 전날 정기복(鄭基福), 정천수(鄭天洙), 최인화(崔仁和) 등은 비밀통문을 북면목동리, 화악리(華岳里), 소법리(所法里) 등지에 배부하였으며, 이윤석정흥교는 직접 주민들을 만나 참여를 독려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5일 오전 9시경 이규봉이윤석, 정흥교를 비롯하여 수백여 명의 군중이 가평 북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이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평 읍내로 몰려가 가평군청, 면사무소, 학교, 우편국 등 각 관청과 공공기관을 나누어 돌며 만세를 외쳤다. 이에 가평읍내의 주민들도 호응하였고, 그 수는 수천에 이르렀다. 이에 일본 경찰들이 3월 15일 저녁부터 주도 인물을 찾기 시작하여 이규봉이윤석, 정흥교, 최종화, 최용화, 최인화 등을 체포하였다.

이튿날 3월 16일 장기영 등 나머지 주도 인물들은 북면 주민 200여명과 함께 목동리의 성황당에 모여 체포된 인물들을 구하기 위해 헌병분견소로 몰려갔다. 이들이 북면 목동리 당고개를 지날 때 헌병들이 몰려와 제지하였는데, 장기영을 비롯한 주민들이 이들의 멱살을 붙잡고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후 주도인물들 가운데 20여명이 공판을 받았다. 장순천은 공판 기록에 없어 체포되지 않았거나 혹은 심문과정에서 풀려났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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