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50 |
---|---|
한자 | 張順賢 |
영어공식명칭 | Jang Sunhy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범성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2월 7일 - 장순현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3월 16일 - 장순현 북면 만세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29년 8월 4일 - 장순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장순현 대통령표창 서훈 |
출생지 | 장순현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83 |
거주|이주지 | 장순현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83 |
활동지 | 장순현 북면 만세시위 참여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일대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북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장순현(張順賢)[1868~1928]은 1868년 가평군 북면 목동리 583에서 태어났다. 구체적인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활동 사항]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 사는 이규봉(李圭鳳)은 고종 인산일에 맞추어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였다. 이규봉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자 정한교(鄭漢敎), 신태연(申泰鍊), 민영순(閔泳純)과 만나 경위를 듣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가지고 가평으로 돌아왔다. 가평으로 돌아온 이규봉은 장남 이윤석(李胤錫)과 제자 정흥교(鄭興敎)에게 이를 설명하고, 이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한다. 3월 7일 이만석(李萬錫), 정재명(鄭在明), 장기영(張基英), 정성교(鄭聖敎) 등 주민 20여 명을 불러모은 뒤 이규봉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였고, 모인 주민 대다수가 동의하여 만세시위의 준비에 들어갔다. 장순현 또한 여기에 찬동하여 만세시위 준비에 합류하였다.
가평군 북면의 만세시위 거사일은 3월 15일로 정해졌다. 이를 위해 먼저 기독교·천도교인들을 통해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옥양목과 종이로 태극기와 비밀통문을 제작하였다. 이를 위해 서당에서 종이를 갹출하고, 최종화(崔宗和), 최용화(崔容和)가 이를 담당하여 거사 전까지 1,800여개의 태극기와 500여매의 비밀통문이 만들어졌다. 3월 14일 밤 정기복(鄭基福), 정천수(鄭天洙), 최인화(崔仁和) 3인은 비밀통문을 북면의 각 동리에 전달하고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5일 오전 9시경 약 50여명의 주민들이 북면의 성황당에 먼저 집결하여 만세를 불렀고, 이어 북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북면사무소에 기다리고 있던 수백명의 주민과 함께 만세를 부른 뒤, 다시 태극기를 들고 가평 읍내로 나아가 만세를 불렀다. 가평 읍내에는 각종 관청과 공공기관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패를 나누어 곳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김정호(金定鎬), 최기홍(崔基弘), 장귀남(張貴男), 김창현(金昌鉉) 등 가평 읍내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는 군중은 수 천에 달했다. 장순현 또한 이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하였다.
저녁이 되어 주민들이 각자 해산하자, 일본 경찰들은 주도 인물들을 색출하여 이규봉·이윤석 부자, 최기선(崔基善)·최인화 부자를 비롯한 1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장기영, 정성교, 이교성(李敎聖), 홍종선(洪鍾先) 등 나머지 주도인물들은 북면 주민 200여명과 함께 구금된 인물들을 찾으러 나섰다. 3월 16일 아침 목동리의 성황당에 모인 이들은 가평헌병분견소를 향해 몰려가던 중 당고개에 이르러 출동한 헌병들과 조우하였다. 헌병들은 총을 쏘며 주민들을 해산하려 하였으나 장기영이 앞장 서서 일본 경찰과 승강이를 하였고, 주민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그러나 헌병들이 지원오면서 장기영을 비롯한 무리들이 체포되었고, 장순현 또한 이들 무리와 함께 하다가 피체되었다.
장순현은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장순현은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